생    애 Life History

   나운영은 포괄적 음악 예술가였다.
그는 무엇보다 실천적 작곡가였으며, 42년 이상을 대학 강단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또한 음악학자로 10권의 음악이론서를 집필했으며, 음악비평가로 수상집과 논문들을 저술했다. 나운영은 젊은 시절 첼로 주자로 활동했고, 평생 합창단과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창작의 끈을 놓지 않은 순수한 작곡가였다.


나운영은 민족음악에 눈을 뜨고 현대음악에 심취하였다.   나운영은 1922년 3월 1일 서울에서 4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운영의 아버지는 생물학자로서 국악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사랑방에서 가끔 동호인들과 제례악이나 영산회상과 같이 상당히 수준 높은 곡들을 합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나운영은 이 사랑방에서 국악 합주를 즐겨 들었으며 5세 때 아버지에게서 양금을 배우며 음악에의 첫 발을 내딛었다.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랑방에서 양금을 치거나 하모니카를 불며 지내다가 아버지의 유품 중 발견한 유성기판으로 들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에 사로잡혀 그 유성기판이 다 해지도록 계속 들어 모든 악기 파트를 다 따라 부르면서 양악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1939년 중앙중학교 졸업반 때 동아일보 주최 신춘 현상 문예 작곡 부분에 가곡 「가려나」 (김안서 작시)가 당선되어 본격적인 작곡 전공의 길을 걷게 계기가 되엇다.

   일본 동경 제국 고등음악학교 본과에 입학한 나운영은 당시 일본 최고의 작곡가인 모로이 사부로 선생에게 작곡학을 사사하며 "너희 나라의 민족음악을 만들어 내라"라는 충고를 통해 민족음악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힌데미트 등에 매료되어 새로운 사조인 현대음악에 심취하였다. 1942년 본과를 종업한 후 연구과(대학원에 해당)에 진학하였으나 1943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연구과를 다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한 나운영은 「조선 정악전습소」에서 민완식 선생에게 양금을 배우는 한편 첼로 주자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43년 채동선 현악4중주단, 1944년 경성후생악단, 1945-50년 올포이스 현악4중주단의 첼로 주자로 활약했으며, 1946년 조선음악가협회가 주최한 〈우리 작품 발표음악회〉에서 홍난파와 나란히 자신의 「첼로 소나타」를 발표하였다.

나운영은 후학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나운영은 24세부터 정년인 65세를 넘어서까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1945년 모교 중앙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1945년 중앙여자전문학교(중앙대학교의 전신) 전임교수로, 1948년 국립 서울대학교, 1952년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1954년 덕성여자대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국악과를 창설하였고, 1955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종교음악과 조교수를 시작으로 1976년까지 교수 및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21년을 봉직한 연세대를 사임한 후 1976년 목원대학교, 1981년 세종대학교, 1982년 전남대학교, 1985년 다시 목원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으며, 1987년 정년을 마친 후에도 명예교수로, 특히 후배 작곡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의 이러한 교육열은 음악 이론 저술로 확대되어, 전 생애에 걸쳐 10권의 음악이론서를 저술했는데, 이는 그의 독창성이 크게 돋보이는 분야로서 대학 강의 및 강좌를 통해 실천적으로 집필된 이론들이었다. 대학음악통론, 화성학, 대위법, 악식론, 합창편곡법, 관현악법, 작곡법, 음악분석법, 연주법 원론, 현대 화성론, 이상 10권의 이론서를 완간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일로서 특히 현대화성론 10강에서는 자신만의 이론인 '한국화성'을 집필함으로써 음악이론가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완성하였다.

   또한 나운영은 잡지 또는 신문에 기고한 원고들을 모아 4권의 수상집을 내놓았는데, 음악적 단상과 시평적 성격의 글들로 채워진 이것들은 사뭇 비판적이고 예리하며 깊이 있고 미래지향적이다.

나운영은 작곡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나운영은 본업인 작곡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46년 민족 음악문화 연구회를 창립하였고, 1947년에는 과도정부 중앙청 문교부 초대 음악편수사에 취임하였으며, 1949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 음악 계장에 취임하여 국악 감상과 현대음악 감상을 주도하였고, 1952년 한국 현대음악학회를 발족했는데, 이 학회는 1956년 한국 현대음악협회로 새롭게 발족되어 그 이듬해 국제 현대음악협회에 정식으로 가입하였고, 1958년에는 문교부 민속악 편찬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악 채보를 시작하였다.
   이 외에도 나운영은 꾸준히 현대음악감상회를 개최하여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였고, 작곡학 강좌, 교회음악 강습회를 개최하여 음악 저변을 넓혔으며, 대한합창단을 창단하여 13회의 정기공연을 개최하였고, 제주도에 한국 민속음악 박물관 설립하는 등, 하루 세 네 시간의 수면도 사치라 여길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한편 나운영은 1948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성남교회에서 성가대를 32년간 지휘하며 자신의 성가곡을 꾸준히 발표하였고, 1979년부터는 매월 〈신작 찬송가 월례 봉헌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여 소천하기 전까지 총 162회에 이르는 발표회를 통해 1,200여 곡의 한국찬송가를 작곡하였다. 또 나운영은 한국교회음악협회 부회장, 1972-93년 한국 찬송가위원회 음악분과위원 및 위원장을 지냈으며, 1975년에는 한국찬송가학회 회장으로, 1977년에는 한국 찬송가 통일위원회 음악전문위원 및 한국 찬송가공회 음악분과위원으로 일하였고, 서울성남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서울성남교회와 자신이 개척한 운경교회를 섬겼다.

    나운영은 1974년에 미국 포틀랜드 대학교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수여받았고, 1966년 서울시 문화상을, 사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나운영은 한국적 음악을 갈구했던 작곡가였다.   나운영은 무엇보다 한국적 음악을 갈구했던 탁월한 한국작곡가로, 그의 작품은 4회에 걸친 〈나운영 작곡 발표회〉와 3회에 걸친 〈나운영 교향악 작품 발표회〉를 통해 주로 발표되었는데, 교향곡, 관현악곡, 협주곡은 물론 가곡, 성가곡, 실내악, 기악곡 등 모든 음악적 장르를 포괄하고 있으며, 동요, 찬송가, 기념가, 조가, 교가, 사가 등 자신의 모든 것을 작품으로 내놓고 삶을 마감한 진정한 작곡가였다.
그는 일평생 '한국음악의 선토착화, 후현대화'(先土着化 後現代化)의 굳은 신념으로 많은 연구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1993년 10월 21일 하나님 품에 안겼다.

            (조선우의 글 중에서 일부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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