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협조적 방해

나 운  영

   결혼식 때에 신랑신부를 세워 놓고 30분 이상이나 축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을 가리켜 나는 협조적 방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이는 선한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나 도리어 악한 결과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에 있어서 사회자가 잔말이 많은 것도 협조적 방해요,  음악예배 때에 설교를 너무도 길게 하는 것도 협조적 방해요,  목사님이 큰 목소리로 찬송가를 틀리게 부르는 것도 협조적 방해요,  회중찬송을 인도하는 사람이 전연 요령부득의 지휘를 하는 것도 협조적 방해요,  성가대원이 연습 때는 나오고 예배 때 안나오는 것도 협조적 방해다.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이와 같이 협조적 방해를 하는 때가 많다.    목사님의 설교에 변화가 적어 지루한 감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음악연주에 있어서와  같이 강약, 속도, 음색, 고저, 표정 등의 변화가 없는데 기인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형식을 때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 바꾸지 못하는 까닭에 지루한 감을 주게 되는 것이다.  목사님들은 설교형식에 있어서 주제와 변주곡형식이나 「론도」형식이나, 「소나타」형식 등 음악형식을 참고하는 것이 좋을 줄로 생각한다.  분명히 설교는 신학강의와는 달라야 할 것이다. 충분한 설명이 없이는 설교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  깊은 내용을 쉽고 변화있는 표정으로 설교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는 협조적 방해가 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설교보다도 도리어 더 중요시되어야 할 것은 찬송문제이다.  즉 예배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음악이므로 절대로 이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생리에 맞는 한국적 내지 동양적 찬송가를 만들어 불러야 될 것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7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전부 외국곡으로 된 찬송가만을 부르고 있는 형편이니 이는 민족적인 수치라 아니할 수 없다.  한국정서가 풍기는 우리의 찬송가가 널리 불리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  특히 오늘날 교회를 졸업해 버리는 사람이 대단히 많은 것이 변화없는 설교와 더불어 찬송가를 포함한 성가대의 특별찬송이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는 데 중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도 또한 크나큰 협조적 방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특수지역 이외에는 교인들의 출석률이 날로 저하되는 듯한데 그 까닭이 이제 지적한 두 가지 문제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물론 교인이 예배드리러 가지 않는 것이 절대로 잘못이나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는 사람 가운데도 영혼과 육신이 분리작용을 하게 되어 별로 은혜를 받지 못하고 헛되이 돌아 가게 되는 일이 많으니 이는 결과적으로는 마치 학교에서 소위 「개근 낙제생」 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전국적으로 구영(求靈)운동이 맹렬히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나 그 반면에 교회를 졸업하는 사람이 늘어 가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하여 어떤 긴급대책을 세워야 할 것인지가 문제라고 본다.  이는 오로지 목사님과 성가대원들이 예배에 협조적 방해를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1958. 8. 국도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