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차이코프스키와 메크부인

나  운  영

   차이코프스키는 그가 25세때에 「페테르스부르그 음악원」을 졸업하고 그 다음해에 「모스코바음악원」에 화성학교수로 취임한 이래 원장에 이르기까지 11년간을 후진양성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즉 그는 작곡을 하는 것에 조금도 권태를 모르고 열중하였으나 가르치는 일은 해를 거듭할 수록 싫증을 느끼곤 했던 것입니다. 전적으로 작곡에 몰두할 수 있는 조용한 시골의 이상적 생활을 항상 꿈꾸고 있었지만 이런 것은 그와는 인연이 먼 이야기로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37세 되던 해부터 메크 부인과의 우애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메크 부인은 그 당시 46세의 한 부호의 미망인으로서 차이코프스키와는 한번 만나 본 일도 없는 분이었으나 그의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던 나머지 연금 6000루불을 아무 조건 없이 내 주었던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차이코프스키는 드디어 교단생활을 청산하고 숙원이었던 행복스러운 작곡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13년간 그는 자유롭게 스위스,이태리 등지를 전전하며 마음껏 작곡을 하여 많은 걸작을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소위 아카데믹한 수법만을 강의하는 것이 학교교육이라고 한다면 또한 이 아카데믹한 수법에서 되도록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창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곡가가 교육을 겸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서로 서신왕래만 있었을 뿐 한번도 만난 일조차 없는 한 미망인이 청년작곡가에게 13년동안이나 연금을 제공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만고에 메크 부인의 재정적 원조가 없었다면 차이코프스키는 <비창교향곡>, <조곡 호두까기 인형>, <바이올린 협주곡> 등 걸작을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따라서 메크부인 없이는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음악을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메크 부인은 비단 악성 차이코프스키의 은인일 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인류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 1962.  새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