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작품과 연주

나  운  영

    우리의 민족음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작품을 많이 생산하는 것과 좋은 연주를 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여기에 먼저 작곡가와 연주가의 관계부터 말하고자 한다.

   18세기까지도 작곡가는 연주가를 겸했던 것이다. 즉  자기작품을 자기가 연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이르러 양자는 점차 분리되기 시작하여 각기 하나를 전문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그들 작곡가가 피아노를 칠 줄 모르거나 연주가가 작곡이론을 전혀 모르고도 그와 같이 대성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우리네들과 같은 기형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피아노의 테크닉과 작곡이론의 풍부한 전문가였던 것이다.
   생각하건데 연주경험을 통하여 악기의 성능과 표현수단을 습득하여야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이고 또한 작곡이론을 모르고 적합한 악곡 해석을 내려 연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에서 이루어지는 작품과 연주도 불가분리의 유기적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좋은 작품과 좋은 연주가 나오지 않는 원인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

   먼저 작품에 대하여 말하면 첫째로 데상 문제이다.
그림에 있어서 데상이 제일 중요한 것과 같이 작곡에 있어서도 이것이 선결문제이다. 이것은 조밀한 작곡이론의 습득과 환상정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민족음악 수립의 방향을 결정하여야 할 것이다.
일제적(日帝的) 유행가조(調)와 봉건적 잔재음악인 찬송가조(調) (오해 없기를 바란다), 창가조(調)를 청산하고,  국악 특히 민요와 농악을 연구하는데서부터 국악의 화성문제, 채보 기보법에 대한 문제, 장구장단의 연구 등은 물론이고 특히 서양의 현대음악(본격적인 째즈를 포함함)에 대한 이해를 가져 대중이 요구하는 음악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직접적인 말로써 표현하여 먼저 보급시키고 다음에 향상시켜야 할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작품은 극히 미미한 상태에 있으나 그 중에서도 어느 것은 찬송가에서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여 시대적인, 감각적인 새로운 맛이 없고 또 어느 것은 고도의 현대음악이어서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즐길 수 없다.  또 한편 사이비 째즈로서 건전한 것을 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국악에서는 전연 창작이 없고 골동품을 무의식적으로 재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양의 현대음악과 국악을 적절히 연구하여 세계음악으로서의 우리 민족음악을 수립하기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 연주에 대하여 말하면,
   첫째로 연주가들은 연주법을 확립하여야 된다.  
작곡가의 의도는 어느 정도까지 그 악보에 나타나고 있으니 작곡이론상으로 그것을 검토한 연후에 자기감정을 살려 표현하여야 할 것이어늘 우리 연주가들은 대체로 소위 기분파여서 아무 근거없는, 무분별한, 괴상한 감정과다증에 걸려 있다.
   둘째로 레파토리 문제이다.
자기의 수학시대의 것만 되풀이해서는 광대나 기생과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닐까 ? 선생에게서 배운 것을 기초로 삼아 신곡을 연구하여 연주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그들은 낭만, 현대음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언제까지나 고전음악 속에서 안주할 것인가 ? 그들은 시대의 흐름을 아는가 ? 우리나라의 연주회의 프로그램은 거의 언제나 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 정도가 아닌가 ? 특히 성악은 불란서 가곡이나, 이태리, 독일의 낭만시대의 노래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나는 아직까지도 피아노에 있어서 드뷔시, 라벨 등을 연주한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레파토리의 범위를 좀 더 넓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작품 연주의 의무를 느낄 줄 알아라.
국산품을 애용하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미숙한 작품도 있을 것이나 대체로 우리 것을 무시하는 이 땅의 민족성부터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아무리 미숙하고 유치한 우리작품이라도 만고 작곡자의 이름을 서양사람의 이름으로 고쳐 써 논다면 아무 비평없이 성의껏 연주할 것이 아닌가 ? 또한 우리작품은 언제까지나 <봉선화>, <성불사의 밤>뿐이 아닐 것이다. 좀더 신작을 연주하려고 하는 성의가 필요하다고 나는 본다.
   우리작품이 생산, 보급, 향상되지 않는 책임을 작곡가와 꼭같이 연주가도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작품도 많이 써 내지는 못하지만 써 놓아도 연주해 주는 사람도 없고 또한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사람도 적은 이 땅의 실정을 생각할 때에 매우 한심스럽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선전하고 자랑해야 할 것은 우리 작품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라의 문화를 아무리 자랑해 무엇하랴.  미국에 <울려고 내가 왔던가>가 한국음악으로 소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작품을 쓰는 사람이나 연주하는 사람은 심사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품과 연주는 대중과 평론가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대중과 평론가가 작곡가로 하여금 좋은 작품을 내놓도록 격려해 주어야 할 것이며, 좋은 연주를 하도록 채찍질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작곡가, 연주가, 대중, 평론가가 일치단결하여 좋은 작품, 좋은 연주를 위하여 노력하여야만 우리 민족음악이 발전을 보게 될 줄 믿는다. 이 글을 쓸 때에 나 스스로 반성하는 점이 적지 않으며 내 손이 떨리는 것을 금할 수 없다. 이 글이 또 다시 탁상공론이나 구호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