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경음악 시비

나  운  영

   아마도 우리나라처럼 소위 순수음악과 경음악이 유달리 확연히 구별되어 있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다 같은 음악인데 순수음악은 중시하고 경음악은 지나치게 경시하는 까닭에 심지어 이에 종사하는 사람까지도 한편은 음악가의 대우를 받고 한편은 소위 「딴따라 패」라고까지 불려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까지도 둘로 나누어 문화인과 야만인(?) 또는 교양인과 무식인(?)으로 취급하려 드는 희비극이 연출되는 것을 볼 때 과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경음악에 대한 정의가 확실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까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경음악이라면 「곡마단 악대」나 일제시대의 유행가를 연상하는 분이 많은가 하면 경음악은 「째즈」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게 생각하는 이도 있고,  더욱 음악인들 가운데는 근대, 현대음악을 모두 경음악으로 취급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분이 상상 외로 많음을 볼 때 고소를 금할 수 없다.
   경음악이란 그렇게도 범위가 좁은 것은 아니다. 무곡, 행진곡을 위시하여 오페레타, 파퓰러송, 샹송, 째즈, 세미클라식, 무드뮤직 등 경쾌하고 명랑한―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들어서 즐길 수 있는 음악이면 모두 경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단 탱고, 부기우기, 맘보 등만이 경음악인 것이 아니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도,  수자의 행진곡도,  롬베르그의 <스튜던트 프린스>(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음악), 거슈인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스트라빈스키의 무용조곡 <병사의 이야기>도, 라벨의 <볼레로>도,  베토벤의 <제 8교향곡>,  바하의 <농민 교성곡>까지도 경음악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기는 음악 중 그 대다수의 것이 경음악이니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도 없고 또 무시한다고 없어질 것도 아니겠고 그보다도 무시할 까닭조차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소위 순수음악을 멸시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순수음악이 있음으로써 경음악의 존재가치가 생기는 것이며 또한 경음악이 있음으로써 순수음악의 존재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를 차별하여 어느 것을 편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자를 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말로 음악을 이해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분에게는 성격상 어딘지 결함이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음악을 듣는데 이와같이 양자를 차별,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지고 차별, 구별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닐까?  미국악단에서 활약하고 있는 작곡가 겸 지휘자 번스타인이나 지휘자 만토바니, 코스테라네쓰, 휘들러 그리고 클라리넷왕(王) 베니굿맨 등은 순수음악과 경음악의 두 분야에서 모두 무시 못할 존재임을 생각할때 우리네의 생각이 너무 편협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위 순수음악에 종사하는 나로서는 라벨, 스트라빈스키, 미요, 오네거, 힌데미트, 탄즈만, 코플랜드 등 세계적 대가의 작품 가운데―근대, 현대음악의 2대 조류중의 하나인 「째즈」적 경향이 많은 사실을 지적하는 동시에 「째즈」를 포함한 경음악에 대한 편견이 하루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경음악이란 소위 악극이나 국산 일본색 유행가 등 속을 제외하는 어디까지나 음악적 제요소(諸要素)를 완전히 갖춘 건전한 경음악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니 특히 오해 없기를 바란다.

 < 1957. 3. 서울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