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치와 음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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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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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부터 56년에 걸쳐 나는 「음악교육개혁 10개조」란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이 글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조 악전교육은 사보(寫譜)로부터 제2조 리듬교육은 행진 또는 체조, 무용으로부터 제3조 청음교육은 반응 훈련에서부터 제4조 고정음명 창법을 병용하라 제5조 감상교육은 절대음악으로부터 제6조 국악교육은 장고장단 지도에서부터 제7조 화성학 지도는 화성분석에서부터 제8조 대위법 지도는 자유대위법에서부터 제9조 작곡법 실습지도는 피아노곡으로부터 제10조 연주법 지도는 악곡분석으로부터 이 10개조 중에서 중등학교 음악교육에 해당되는 부문은 제1, 2, 3, 4, 5, 6조이다. 음악교육은 별로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물론 교육은 나의 전공이 아니다. 그러나 24년동안 대학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한편 1961년부터 68년까지 문교부 음악과 장학위원으로 있는 동안 경향 각지로 학사시찰을 다니면서 음악교육이 별로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장학위원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속(續)음악교육개혁론」을 적어 보기로 한다.
소위 음치(音痴)에 대하여 교사들은 흔히 음치란 말을 손쉽게 사용한다. 가령 노래를 잘 못 부르면 음치로 단정해 버린다. 음악에 취미를 못가진 학생은 음치에 속한다고 말해 버린다. 그런데 이런 학생을 가지고 음치라고 규정을 짓는다는 것은 큰 죄악을 범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음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고막이 찢어졌다든가 정신병자라면 몰라도 온전한 신체와 정신의 소유자 가운데에는 음치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제 두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첫째는 내가 경영하고 있는 「성남 유치원」(운경유치원 전신)의 경우이다. 음감교육에 중점을 둔다는 소문 때문인지 먼 곳에서 소위 음치에 속하는 듯한 어린이들이 해마다 모여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음치가 없다는 말을 학부형에게는 물론 보육교사들에게 강조했다. 즉 음감이 남들보다 둔한 어린이는 있어도 음치는 없다고 자신을 가지고 말을 했다. 가령 음감에 있어서도 특히 리듬에 대해서 둔한 어린이, 음정에 대해서 둔한 어린이, 리듬과 음정에 대해서 모두 둔한 어린이 등 세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런 어린이는 개별지도를 하면 된다. 즉 따로 지도를 하면 차차 나아진다. 물론 이에 여러 가지 기술이 필요하지만 우선 교사는 「음치는 없다. 통칭 음치는 고칠 수 있다」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만약 리듬감이 둔한 어린이에게는 행진을 시키면서 노래를 부르게 한다든가 북, 캐스터네츠, 탬버린 등 타악기를 사용해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고, 음정감이 둔한 어린이에게는 하모니카나 멜로디온을 불게 한다든가 오르간, 피아노를 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밖에 어린이들 가운데는 너무 부끄럼을 타서 남 앞에서 혼자 노래 부를 때에는 형편 없이 틀리는 어린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용기를 내어 자신을 가지고 부르도록 성격부터 고쳐주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어린이들을 개별지도한 결과 음치로 지목을 받던 어린이가 1년 뒤에는 독창 방송을 하고 유치원을 졸업하는 예를 10년 동안 목격하고 있으니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음치는 없다. 만약에 음치가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넉넉히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고등학교 여학생의 경우이다. 이 학생은 애국가조차도 전혀 틀리게 불렀었다. 그야말로 자기 작곡(?)으로 부르는 듯 했었다. 가령 피아노로 「도」소리를 들려 주고 소리를 내라고 하면 전연 엉뚱한 딴 소리를 냈었다. 나는 이 학생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 오랜 고민 끝에 두 가지 방법을 연구해 냈다. 즉 하나는 피아노로 먼저 음을 들려 주고 노래 부르게 하지 않고 먼저 학생이 내고 싶은 음에서부터 시작하도록 자유를 주었다. 이렇게 해 보니 전보다 덜 틀리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다장조의 곡은 다장조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 학생에게는 우선 이 원칙을 적용시키지 않았었다. 대체로 학생들 가운데는 자기의 음성에 따라 높은 소리를 못 내는 사람, 낮은 소리를 못 내는 사람, 가운데 소리를 못 내는 사람 등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으니 이런 학생에게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개별지도를 하면 된다. 또 하나는 가령 「가운 다」(중앙 C)음을 소리 내게 할 때에 「가운 다」음보다 8도(1 옥타브) 높은 음과 또한 8도 낮은 음을 동시에 피아노로 들려 주었다. 이렇게 해 보니 「가운 다」음을 정확하게 소리 내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즉 이렇게 피아노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어떤 음에 대해서 8도 위아래의 음을 들려 주면 잘 들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에는 피아노 소리를 잘 듣고 소리를 내도록 주의를 주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학생을 개별지도한 결과 음치로 낙인이 찍혔던 이 학생이 반년 뒤에 음악대학에 입학된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사실만 가지고도 「음치는 없다. 만약에 음치가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 것이 또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어린이나 고등학생에게 음치라는 불구자(?) 취급을 한 것은 무서운 죄악이라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교사들은 신념을 가지고 이런 문제아들을 가르쳐 주기 바란다. 통계에 의하면 살인범, 강도범 가운데는 음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신, 성품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꽃이나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참말로 꽃이나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이거나 흉악범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치란 온전한 신체와 정신의 소유자 가운데에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문제아를 바르게 교육하는 데서 참 즐거움을 맛보는 교육자가 되기를 바란다.
음맹(音盲)에 대하여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음맹이 아닌가? 소위 콩나물 대가리(오선보)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 국민학교에서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0년 이상이나 소위 악전공부를 하건만 이렇게도 음맹이 많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과연 악전이란 그렇게도 힘든 공부일까? 악전이라면 기보법과 기초이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기초이론은 그만두고라도 음표, 쉼표, 조표를 10년이나 걸쳐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절대로 어렵지 않은 기보법을 모른다는 데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즉 하나는 학생들이 아예 기보법을 배우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것은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부모를 비롯하여 선배나 동료 가운데 악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기보법이란 음악 전문가가 될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고 그 밖의 사람에게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학생이 절대다수라 할 수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런 노릇이다. 또 하나는 교사들이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음악교육 개혁론 10개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다. 「악전은 주로 기보법에 관한 이론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종래의 교수법을 보면 거의 매 학년 첫 시간에 온음표라든가 높은음자리표 등을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체하다가 그만두고 청창법(聽唱法)으로 옮기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 왔다. 즉 가창지도와 관련 없이 악전을 가르쳐 왔으므로 악전의 필요성 자체를 모르게 되고 또 악전공부에 취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사보(寫譜)를 먼저 시키고 그 다음에 틀린 것을 고쳐 줄 때에 이론을 설명하라고 나는 주장한다. (중략) 이렇게 되면 보다 흥미있게 또한 능률적으로 악전 교육을 시킬 수 있다.」 1952년에 「새로운 음악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또한 말한 일이 있다. 「과거의 교육은 악보를 떠난 교육이었다. 즉 뜻을 알건 모르건 서당식으로 선생이 하는 대로 따라서 흉내 내는 원시적 노예교육이었다. 그러므로 가령 책을 본대도 악보는 보지 않고 가사만 보고 노래했던 것이다. 여기 국어와 음악의 습득과정을 비교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글자=음표, 쉼표, 읽기=시창, 적기=청음, 짓기=작곡, 말본=악전―이것을 보면 어학과 음악은 같은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외국어는 잘 해도 음악만은 악보 하나 볼 줄 모르는 기형인을 만들어 놓은 것은 과거 교육의 결함 중에서도 가장 큰 결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악보를 가르치면 자연히 시창, 청음, 작곡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에 . . .」 이상으로 교사들이 올바르게 가르치지 못한 증거가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악보를 읽을 줄 모르는 음맹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속히 음맹을 퇴치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악보를 읽지 못하는 학생들에 대해서 그 원인과 해결책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즉 아무리 악보를 읽을 줄 안다 하더라도 악보를 읽으면서 악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오늘날 악기의 도움 없이 제대로 정확한 음높이로 노래 부를 줄 아는 학생이 몇 퍼센트나 될 것일까? 소위 시창법이란 혼자서 악보를 읽으면서 음정이 틀리지 않게 노래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만약 혼자서 음정을 찾아 부를 수 없다면 아무리 악보를 읽을 줄 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청창법(聽唱法)과 다름이 없어지고 말게 된다. 음정은 악기의 도움 없이 혼자서 찾아내어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음정연습을 철저히 시켜야 한다. 기본 음정연습은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든지 모두가 사용하고 있는 프란츠 뵐네르가 지은 <코르위붕겐 제1권>이 역사적인 명저이다. 문교부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정부 환도 후까지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국민학교까지도 이 책을 교재로 정하고 강제로 가르쳤었으나 이것이 학생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줄 뿐 별로 효과가 없다는 그릇된 여론에 따라 개정된 교과 과정에서는 그만 이것이 제외되어 버렸다. 음정연습은 가창 교재를 통해서 임기응변으로 가르치면 된다는 것으로 돼 버린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이상적인 방법인 듯싶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아예 음정연습을 시키지도 않고 다만 피아노 소리를 듣고 따라서 부르게 하는―그야말로 서당식 노예교육이 되어 버렸으니 개선(改善)이 아니라 개악(改惡)라고 나는 주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기야 과거에 <코르위붕겐>에 대해 학생들이 염증을 느꼈었고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한 느낌이 없지 않으나 이것은 책이 나쁜 까닭이 아니라 교수법이 나빴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들 이 책으로 교육적 성과를 올리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효과를 못 본다는 것이 교수법이 나쁜 까닭이 아니고 또 무엇이랴? 우리나라에서도 십 수종의 「코르위붕겐」이 나와 있지만 나의 역.주 해설로 이상사(理想社)에서 발행된 책의 일러두기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이 책은 기본 연습곡과 응용 연습곡으로 되어있다. (2) 기본 연습곡에는 음계를 통한 연습곡과 화음을 통한 연습곡의 두 가지가 있다. (3) 기본 연습곡은 먼저 정확하게 조율된 피아노 또는 오르간을 사용하여 계이름으로 연습한 뒤에 악기의 도움을 받지 말고 불러라. (4) 응용 연습곡은 절대로 악기의 도움을 받지 말고 불러라. (5) 응용곡은 표정을 넣어 음악적으로 부르는 습관을 길러라(이하 생략). 이런 방법으로 2도 음정부터 3도, 4도, 5도, 6도, 7도, 8도 음정까지 철저히 연습을 시킨다면 누구나 악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정확한 음정으로 부를 수 있는 귀와 음감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지 않고 무턱대고 처음부터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전적으로 피아노에만 의존하면서 앵무새 모양으로 흉내만 내게 하니 이것을 어찌 교육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마치 마이크 앞에서 자랑스럽게 노래하던 유행가수가 정전이 되면 꼼짝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기가 없으면 소리조차 못 내는 병신 아닌 병신을 만들어 놓는 사람이 교사라는 말을 다시는 듣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올바를 방법으로 가르쳐야 될 것이 아닌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로 음악교육 시찰을 갔다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곳에서는 음악시간에 피아노 한 대도 없이 가르치는 학교가 많다는 것이다. 음악의 나라 학교에 피아노가 없다는 말은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다시 말해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음악시간에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악기 없이도 학생들 개개인이 정확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피아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우리나라의 음악교육과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요, 꾸며낸 이야기만 같다. 나는 지루하도록 음정연습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다. 물론 음정연습에는 <코르위붕겐>이 가장 좋은 교재임에 틀림없고 적어도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6년 동안이면 통칭 음치에 속한다고 지목되는 학생까지라도 넉넉히 제1권을 모두 마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코르위붕겐>없이 가창 교재를 통해서 임기웅변으로 까다로운 음정만을 골라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의 속성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속성교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해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니 부교재로라도 <코르위붕겐>을 다시 사용하는 교사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고 싶다. 이렇게 하여 학생 개개인이 악보를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유치한 노래, 퇴폐적인 노래, 속된 노래, 음탕한 노래 등은 자연 도태될 것이 분명하며 음악을 즐기고 제대로 이해하는 교양인이 모두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 음맹이 퇴치될 날이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만은 없다. 교사들의 능력과 성의에 따라서는 몇 해 안 가서 음맹이 없어질 수도 있다. 음맹이 없어진다면 일제 시대의 왜색 유행가나 오늘날의 <동백 아가씨>를 즐겨 부르는 교양 없는 지식인도, 문화인도 앞으로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을 미리 상상해 볼 때 교사들의 사명이 무겁고도 크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음치는 없다. 만약에 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음맹을 퇴치하자. 시창력을 가진 백성을 만들자. 좋은 노래를 골라 부르는―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국민개창(皆唱)운동을 다시 일으키자.」
< 1969. 9. 중등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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