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집 '독백과 대화'
 

교회 음악의 세속화 
 ―카톨릭의 성가(聖歌) 개정령(改正令)을 보고―

나  운  영



   외신에 의하면 교황 바오로 6세는 3월 7일 로마 카톨릭 성가에 대한 교령(敎令)을 개정함으로써 미사 때 비트리듬과 째즈를 연주할 수 있는 길을 터 놓았는데,  오는 5월 14일 성신강림(聖神降臨) 축하 주일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몇몇 신문은 성가의 혁명이니, 성가의 현대화니 하여 크게 보도하고 있는데도 특히 기독교 음악인들의 반응 또는 반발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째즈란 아프리카 흑인의 리듬을 강조하여 작곡되는 음악 또는 순수음악의 리듬이나 멜로디나 화성을 바꿔서 흑인식 연주법에 의하여 경음악적으로 연주되는 음악을 말하는데 과연 이런 음악이 교회에서 용납되느냐에 대해 우리는 「강 건너 불 구경」 모양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첫째로 비트리듬이나 째즈는 고상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므로 이런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일 필요는 없다. 교회에서 한 발만 나가면 비트리듬이나 째즈를 싫증이 나도록 들을 수 있는데 이런 것을 교회에서 연주한다면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이 다른 점이 무엇이며 교회와 사회가 다른 점이 없지 않은가?  이것은 곧 교회음악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둘째로 비트리듬이나 째즈는 현대음악의 아류(亞流)로서 유럽의 멜로디, 화성, 악기가 아프리카 흑인의 리듬과 혼합되어 미국에서 육성된―리듬을 가장 중요시하는 음악이며 비교적 많은 독소(毒素)를 지니고 있으므로 건전하지 못하다.  따라서 교회음악의 현대화를 위하여 이런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교회음악을 무조음악(無調音樂)으로나 12음음악으로나 전자음악으로 작곡할 수 있다.  즉 현대적인 리듬, 멜로디, 화성을 구사할 수 있으나 이처럼 경박한 것,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난잡스러운 것은 교회음악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지 않은가?  이것은 곧 교회음악의 타락을 의미한다.
   셋째로 이 성가에 대한 개정령이 불신자 특히 청소년을 위한 전도수단이 될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이 청소년을 제외한 모든 경건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할지 모른다.  이런 음악은 성적(聖的)인 감정보다는 성적(性的)인 감정을 불러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요즈음 우리는 합동찬송가 개편에 있어서 부흥가, 복음가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빼어 버리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이 때 카톨릭에서 비트리듬이나 째즈를 받아들인다면 신교(新敎)도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 틀림 없다.  다만 이런 음악을 부흥회 때에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미사 또는 예배 때에는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넷째로 우리나라에서도 찬송가의 토착화가 크게 논의되고 있는 이때에 아프리카 흑인식의  성가(聖歌) 아닌 성가(性歌)를 우리가 부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다.  흑인영가 중에서도 정적(靜的)인 것은 무방하나 동적(動的)인 것은 예배 분위기를 크게 깨뜨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외국 사람의 찬송가만 부르고 있는 형편인데 이에 비틀즈 음악마저 합쳐지게 된다면 한국 찬송가는 영영 이 땅에 뿌리를 뻗을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끝으로 일반적으로 카톨릭은 보수적이고 신교는 진보적이라고 생각되어 오고 있는 이때에 카톨릭이 비트리듬과 째즈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오히려 진보적이라고 생각이고 이를 반대하는 나의 의견이 지극히 보수적인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나는 어디까지나 경박하고 난잡스럽고 경건치 못한 것을 배격하는 것뿐이고 절대로 교회음악의 현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엄숙하고 경건하고 숭고해야만 교회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교회음악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속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음악(音樂)과 음악(淫樂)은 다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음악을 구해 내야 할 때가 왔다.

 < 1967. 3. 19. 교회연합신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