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집 '독백과 대화'
 

 조로증(早老症)에서의 탈피

나  운  영

   우리나라 음악계처럼 조로증 환자가 많은 곳도 없을 것이다. 교원 양성기관처럼 되어 버린 음악대학에서 실력 있는 음악인을 기대하기는 어려우며 세대교체 이전의 상태에 오늘의 음악계는 놓여 있다. 그러면 악단의 내일을 살펴보자.
    소위 구악일소(舊惡一掃)니 자의반 타의반이니 세대교체니 하는 말은 5.16 혁명 이후에 나타난 유행어이다. 이 중에서 세대교체는 학계나 문화계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과연 세대교체란 무엇인가? '세대가 교체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으면 '세대를 교체시켜야 한다.'는 뜻인가?  '세대가 교체되어야 한다.'는데 대하여 나는 조건부로 찬동을 할 수는 있으나  '세대를 교체시켜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수긍이 안된다. 즉 이것은 강제성을 띠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세대교체에 따라 정년퇴직이란 말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참으로 정년퇴직인지 「정년면직(停年免職), 정년해직(停年解職)」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도대체 학계나 문화계에 있어서 세대교체니 정년퇴직이란 말이 해당되느냐 부터를 문제삼고 싶다. 대학교수는 60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정년퇴직이라니 이는 부당한 논고(論告)가 아닐까? 작곡가나 연주가도 나이를 먹을 수록 원숙해지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강제로 세대를 교체시키려는 것은 시행착오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세대교체를 전적으로 반대하려고 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강제성을 띠어서는 안되며 또한 이것이 연령과는 관계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즉  70이니 65니―이렇게 선을 그어 놓고 일률적으로 처리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령이 문제가 아니라 능력이 문제가 아닌가? 연령과 관계 없이 연구 안하는 대학교수나 예술가는 마땅히 자진해서 소리 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연령을 문제 삼아 외적인 압력을 가해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좋은 뜻에서 시작된 세대교체론이 「필요악」이란 말로 표현되어서는 안될 것이 아닐까?...

    그러면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악단의 세대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학자나 대학교수가 갑자기 나타날 수 없는 것과 같이―아니 그 이상으로 진정한 의미의 예술가가 되기는 힘이 든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 할지라도 매일 6,7시간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3,4세부터 시작하여 70,80세가 넘도록 매일 7,8시간의 연습을 계속하지 않으면 실력의 현상유지조차 어렵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대에서 쓰러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고해(?)을 겪는 것이므로 사실상 악단에 있어서는 세대교체니 정년퇴직이니 은퇴공연이니 하는 말이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에 그러한 예술가가 몇 사람이나 될는지가 문제이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60은 커녕 50이 되도록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연주가나 작곡가가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에는 끝까지 전공을 바꾸지 않고 연구하는 자가 드물다. 즉 중도에서 전공을 바꾸거나 또는 전공을 이탈해 버리는 자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강제로 세대를 교체시키려 들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극히 순조롭게 교체가 되어 버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년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구태여 연령을 따진다면 60이나 65새가 정년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마도 40세 이후―아니 30세 이후가 정년이 되는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되는 조로증 환자는 확실히 악단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가지고 항의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위에서 가상(假想)정년을 30세 이후라고 지적했다. 30세 전후란 말에는 하나의 근거가 있다. 즉 음악대학을 나온 뒤에 20년이고 30년이고 연구를 계속해도 대성하기 힘든 일인데 음악대학 졸업과 동시에 전공마저 졸업해 버리는 자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캐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전공을 택하는데 있어서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화려한 무대를 동경하고 막연히 전공을 택한 자들 중에는 재학 중에도 전공을 바꾸는 자가 있는가 하면 졸업장을 받는 동시에 음악 자체를 졸업해 버리고 다른 사업을 꿈꾸는 자가 속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권위있는 스승에게 적성검사를 받은 다음에 전공을 택해야만 후회가 없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나라의 음악대학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연주가나 작곡가 양성을 위한 기관이라 말하기 어렵다.  좋게 말해서 음악교사 양성기관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이런 제도하에서는 실력있는 연주가나 작곡가가 많이 배출되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파리 국립음악원 모양으로 음악대학이나 또는 대학 음악과와 달리―콘세르바토리(음악원)와 같은 교육기관을 만들어야만 연주 전문가나 작곡 전문가를 악단에 내어 놀 수 있다. 즉 연령 제한 없이―조기교육을 실시해야만 된다는 뜻이다. 도대체 대학입학에 제2지망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보다도 연주가나 작곡가를 꿈꾸고 음악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이 몇이나 될 것인가? 아마도 중학교 음악교사를 꿈꾸고 지망하는 자가 대다수가 아닐는지 의심이 된다. 이러한 상태로는 연주가나 작곡가가 많이 생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공을 계속하는 자가 많아질 수도 없고 따라서 연령에 제한 없이 자동적으로 세대가 교체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니 더욱 한심스럽기만 하다.
연주계   ―악단에 있어서는 어느 분야보다도 연주계는 세대교체가 잘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김원복 여사를 비롯한 몇몇 분을 제외하면 젊은 세대에게 그리 부끄럽지 않은 연주를 하는 연주가가 매우 드문 반면 한동일, 정경화, 김영욱, 정명화, 신수정 등등을 자신있게 내세울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밖에도 이청, 이대욱, 박미영, 장혜원, 김정규, 김정자, 백건우, 장유경, 한명도, 김원모, 김혜주, 김의명, 조성실, 한옥수, 김영남, 민초혜, 현해은, 이명순, 이종영, 김형규, 이희춘, 임유직, 유규호, 박혜수(이상 無順) 등등이 모두 귀국하여 내 나라에서 활동할 수 있게만 된다면 좋은 의미에 있어서의 세대교체가 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그러나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요즈음 교향악단의 스트링의 멤버를 볼 때 확실히 세대교체가 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특히 바이올린이나 첼로 부문에 있어서 별로 음정이 틀리지 않는 신인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세대교체가 되었다는 산 증거라 할 수 있다. 바라기는 이들 신인 혹은 재학생들이 독주에만 치중하지 말고 실내악을 통하여 앙상블(重奏)을 많이 함으로써 좀 더 진지한 연주 체험을 가져야만 연주가로서의 대성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다.
작곡계   ―우리 악단에 있어서 아직도 제대로 논의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작곡계가 아닌가 생각하면 스스로 부끄럼을 느끼게 된다. 멀리 서독에서 윤이상씨가 건재하고 있을 뿐 국내에서는 2,3명의 발표회를 제외하면 별로 활동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기야 대학원 석사과정의 하나로 발표회가 열리기는 하나 마치 창간호 겸 폐간호 격으로 처음이자 마지막 발표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때 작곡계만은 「세대」니 「교체」니 하는 말을 가지고 논할 자격조차 없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홍난파선생을 비롯하여 전문 또는 비전문의 작곡가들의 활동이 있기는 했으나 그 대부분이 예술가곡 또는 서정소곡(抒情小曲), 동요에 그친 느낌이 없지 않으니 먼저 구세대, 신세대를 논하기 전에 이제부터라도 실내악곡, 교향악곡도 작곡할 수 있는 실력을 길러야 할 것이 아닐까? 따라서 좀 더 전문적인 작곡가가 많이 나와야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두 말할 것 없이 작품을 쓴다는 것은 생리적 현상에 불과하다. 쓰지 않고는 못 배겨 토해 내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할 것이 아닌가? 작품을 쓰는 데는 가족계획(?)이란 해당도 되지 않는다. 작품은 꾸준히 쓰는 동안에―잘못해서 걸작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면 세대를 운위할 것 없이 「새출발」 또는 「재출발」을 해야겠다. 나는 이런 뜻에서 이영자,박재열, 윤해중, 박중후, 백병동, 강석희, 조병옥, 이경희, 박준상, 김동환, 윤양석, 성낙헌, 안일웅(이상 無順) 등등과 대학원 재학생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싶다. 우리는 첫째로 민족적 전통을 계승해야 한다. 둘째로 민속적 요소를 발굴하여 그것을 현대화함으로써 민족음악을 창조해야 한다. 즉 민족적 아이디어와 현대적 스타일이 결부된―새로운 형태의 음악을 창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오늘날과 같은 국제문화 교류시대에 있어서 우리는 외국음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지 않았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백해무익한 지나친 째즈調와 왜색調까지 받아들여 중독, 세뇌, 마비상태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한국적 선율에 서양 고전화성을 붙이는―마치 갓 쓰고 양복 입은 격인―수준 이하의 아니 기법 이전의 상태에서 답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형편으로는 국제교류란 말도 꺼낼 수 없다. 즉 아리랑 비슷한 멜로디에 찬송가 화음을 붙이고 이에 왈츠리듬을 곁들여 연주한다면 이것은 나라 망신을 국제적으로 드러내 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새 출발 또는 재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연주계가 아무리 세대교체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 작품을 외국에서 연주하지 않는다면 국제교류는 이루어질 수 없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그들이 외국곡 만을 연주한다면 국제교류라 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민족음악을 연주, 소개해야만 국제교류의 의의가 있는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작곡계가 활발한 활동을 보여야 할 것이다.
평론계   ―올바른 평론은 마땅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된 평론, 무식한 평론, 무책임한 농필(弄筆)은 암적 존재밖에는 안된다. 평론인과 평론가는 다르다. 평론인은 비전문가에 속하며 평론가만이 전문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우리나라에는 평론가는 별로 없다고 단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평론을 전공한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우리 악단에 있어서의 모든 평론은 아마추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런 평론에 귀를 기울이거나 괘념할 필요도 없다. 위에서 나는 적어도 우리나라에는 음악 평론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반면에 평론인은 유명 무명 합해서 상당히 많이 있는 줄로 안다.
   그들 중에는 세기적 피아니스트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형편 없이 평한 대가(?)들도 있으니 소가 웃을 노릇이다. 그러나 그들은 언론자유나 평론자유가 보장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평을 해도 좋은 줄로 알고 부지런히 붓을 드는 모양이나 자기의 글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야 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음악 문외한 내지 애호가들 중에는 그 평론이 바로 된 것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춘 자가 매우 적기 때문에 이 그릇된 평론, 무식한 논평, 무책임한 농필에 현혹되기 쉬우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악단에 있어서의 소위 음악평에 대하여 모랄을 운위하고 싶지 않다. 모랄 이전에 속하는 문제가 제거,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암적 존재 내지 백보 양보해서 무해무익한 평론은 마땅히 없어져야 한다. 연주가 또는 작곡가가 되려다 못된 자들의 종착역과도 같은 인상마저 주는 사이비 평론가―즉 평론이야말로 연령과 관계 없이 교체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우리 악단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평론가를 기다리고 있다. 도시 평론 없는 악단은 제대로 발전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참고 기다려야겠다. 평론가는 하루 아침에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평론을 전공한 사람이 나타나기를―아니 적어도 전공실기를 지도하는 선생들과 그 제자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평론가가 나오기를 갈망한다. 한편 우리나라의 현역 평론인에게 바라노니 연주가나 작곡가나 실기 지도교수를 평하려 드는 것보다는 이들과 대중 사이에 서서 대중을 계몽시키는 일에 새로운 사명을 느껴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한 사람이라도 음악인구를 늘리기 위하여 노력해 주기 바라는 동시에 非예술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는 지나친 째즈조와 왜색조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진력해 주기를 또한 부탁하고 싶다. 이것이 급선무이며 더욱 중대한 문제임을 나는 강조한다. 이 일을 음악 평론인의 활동분야로 삼고 일함으로써 생의 보람을 찾아 주기를 바란다. 오늘날 40, 50대 중에는 왜색 유행가, 흘러간 옛 노래에서 일제 때의 향수를 느끼는 듯 지그시 눈을 감고 즐기는 자가 많은가 하면 20, 30대는 물론 10대까지도 비트리듬에 도취되어 있는 형편이니 국가 장래가 대단히 염려된다. 방송을 통해서 퍼지는 音樂 아닌 淫樂, 娛樂 아닌 誤樂에 젖어 있는 자들을 구해 낼 자는 오직 평론인 밖에는 없지 않을까? 메사돈과 같은 비틀즈음악과 왜색가요, 저속가요가 없어지고 민속적이며 명랑하고 건전한 국내 외의 노래가 자발적으로 불리어질 때 이 병든 사회가 밝아지며 순수음악, 경음악, 종교음악, 세속음악, 그리고 특히 국악을 골고루 사랑할 수 있는 교양인이 날로 많아질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이 귀한 일을 평론인이 맡아 감당해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평론계는 세대교체를 논할 단계에 놓여 있지 않다. 더욱이 젊은 세대의 평론이란 격에 맞지도 않는다. 젊은 세대는 동료나 선배를 감히 평하려 들기 전에 먼저 선배에게서 친절한 평을 받을만한 연주활동 또는 작곡활동부터 착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연주는 신세대의 것이며 작곡은 신구세대를 가릴 것 없이 함께 활동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평론만은 본질적으로 기성세대의 것이어야 한다고도 생각된다.
교육계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학교수는 60세부터」라는 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렇다면 교육계에서도 세대교체란 말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 신노심불노(身老心不老)란 말이 있다. 정력은 다소 부족하다 하더라도 정열이 있으면 된다. 조로증에 걸린 자가 많은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연령과 관계 없이 몸이나 마음이 늙은 사람이 많지 않나 생각된다.
   그야말로 신노심불노(身老心不老) 뿐만 아니라 심노신불노(心老身不老)도 있고 신노심역노(身老心亦老)에 속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것은 연령을 가지고 선을 그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 정해져야 할 일이 아닌가? 아직도 명치시대의 책을 번역하여 수십년 강의하고 있는 대학교수가 있다면 그런 자는 연령과 관계 없이 교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사조(新思潮)를 호흡하며 신학설(新學設)을 힘써 소개하는 老교수에게는 정년퇴직, 정년면직, 정년해직이란 안될 말이다. 요즈음 연구교수 제도가 일부 대학교에서 시행되게 된 것은 만시지탄(晩時之歎)을 금할 수 없으나 매우 다행한 일이다.

    연령과 관계 없이 그 학적인 실적에 따라 연구교수가 임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대」니 「교체」니 할 것 없이 능력에 따라 자연도태(自然淘汰)가 되도록 하면 될 줄로 안다. 외국에 있어서 老교수가 자진사퇴하여 사무직원이나 수위가 되어 정든 직장에서 그의 생애를 마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본받아야 할 일인 줄 안다. 우리는 연령에 대해서 신경을 쓰기 전에 「새로운 교수법」에 대해서 정신을 집중시켜야겠다. 예를 들어 기악실기지도에 있어서 에튜드(연습곡)에만 중점을 두던 과거와 레파토리(연주회용 악곡)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현재를 비교해 볼 때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되므로 장래에 있어서는 에튜드와 레파토리를 골고루 가르치는 교수법으로 바뀌어야 되겠다는 것을 나는 역설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방법만이 속성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수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학생들에게 시범연주를 들려 주면서 가르칠 수 있는 기악지도교수가 극히 희소한 것만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니 외국의 권위있는 교수를 초청하여 그들에게서 시범연주를 통해서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야만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연주기술이란 말로만 가르칠 수 없다. 외국인 교수들이 자기 자신이 직접 연주하면서 악곡분석 및 연주법 설명을 하는 것을 볼 때―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도리어 이것을 신기하게 느끼는 그 자체가 신기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은 루빈스타인을 비롯하여 제르킨, 리치, 피아티고르스키, 스테파노, 런던 심포니, 도이치 오페라단 등 세계적인 연주를 들을 기회가 많아진 것만도 다행한 일이나 순간적인 연주를 구경하는 것보다는 단지 한 시간이라도 그들에게 직접 레슨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것이 얼마나 교육적으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일인가를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음악교육계만은 세대교체니 정년퇴직이니 운운하기 전에 먼저 이 근본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1967. 7. 世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