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성가(聖歌)와 성가(性歌)는 다르다

나  운  영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의 구별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 가운데는 <Church Music>, <Music  in Church>가 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Church Music도, Music  in Church도 아니다. 다시말해서 이것은 <교회 밖의 음악>이요, 세속음악이요, 속세음악이다. 교회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싫도록 재즈나 팝송을 들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구태여 교회 안에까지 음악(淫樂)과 성가(性歌)를 끌어드릴 필요가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와 사회가 다른 점이 없지 않은가? 사회음악이 아무리 현대화된다 하더라도 세속화되어서는 안될 말이다.'
  - 이상은 1969년 6월에 썼던 「교회음악의 세속화와 현대화」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주지하는대로 교회음악의 세속화란 말은 1967년 3월 7일 교황 바오로 6세가 <성가에 대한 개정령>을 공포한데서 비롯한 것인데 미사 때에 비트리듬이나 재즈를 연주해도 좋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교회음악의 세속화」란 글을 통해서 '교회음악의 현대화와 세속화는 다르다. 나는 교회음악의 현대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이든 현대적이든 엄숙하고 경건하고 숭고해야만 교회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교회음악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교회가 세속화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음악(音樂)과 음악(淫樂)은 다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음악을 구해 내야 할 때가 왔다'고 역설한 일이 있다.
   그런데 작년 크리스마스 때와 금년 여름에 어느 교회 밤 예배에 가수들이 기타를 들고 나와 성가(?)를 부른 것이 크게 주목을 끌어오던 중 요즈음 YMCA에서 다시 이 문제가 화제를 모으게 된 모양인데 이에 대해서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첫째로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은 본격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어 카톨릭에서는 중세기음악인 화성없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지금도 부르는데 그 신비하고도 경건한 분위기란 세속음악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교회음악에 사용되는 리듬, 멜로디, 화성과 세속음악에 사용되는 리듬, 멜로디, 화성이 틀리는 것은 아니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무드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작곡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그 무드가 종교적이 아니라면 그것도 교회음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비트리듬이나 재즈처럼 경박한 것,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난잡스러운 것, 관능적인 것, 도발적인 것은 교회음악으로서는 적합하지 못하다. 위에서 말한 <성가 개정령>이 불신자 특히 청소년을 위한 전도수단이 될지 모르나 결과적으로는 이 청소년을 제외한 모든 경건한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 버리게 만들지 모른다. 어디까지나 교회음악은 세속음악과 달라야 한다. 만약에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이 같거나 비슷하다면-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니 술집에서 예배를 보면 될 것이 아닌가? 교회음악은 본질적으로 정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동적인 것은 보다 종교적이 못된다. 우리의 생리에 잘 맞는 흑인영가에 있어서도 정적인 것은 좋으나 동적인 것은 재즈와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교회음악으로서는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성가대원과 가수의 구별
   둘째로 성가대원과 가수는 구별되어야 한다. 순수음악인과 경음악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듯이 성가대원은 비 순수음악인 또는 경음악인이 아니어야 한다. 소위 인기가수가 아무리 신앙적으로 노래를 잘 부른다 해도 교인들에게 감화를 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회활동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생이나 창부도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른다 해도 성가대원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가수가 그 직업을 그만 두었을 때에는 얼마든지 성가대원이 될 수 있겠지만 가수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성가대원을 겸할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성가대원과 가수가 구별되어 있지 않다면 교회의 질서가 문란해지고 말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특정인을 교회 강대상에 끌어 올려 쇼 공연(?)을 방불케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가 현대적이고 복음적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제아무리 그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찬송(?)을 부른다 해도 그것은 극히 일부의 사람에게는 감동을 줄지 모르나 절대다수의 진실한 교인들에게는 조금도 은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로 한해에 젊은이들이 본 단 두 번의 예배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은 마치 '일년 중 한 두 번 나쁜 짓 했기로 그리 문제 삼을 것 없지 않으냐?' 하는 논법과 무엇이 다르랴? 다시 말해서 일년의 52주 가운데 백네 번의 예배 중 단 두 번의 그것이 오늘날 교계를 이다지도 어지럽게하고 있는데 이래도 이것을 묵인해 달라는 말인가? 소위 인기가수가 비틀즈 차림을 하고 몸을 비틀며 재즈나 팝송을 불러야만 우리나라의 교회와 교회음악이 현대화되는 것일까?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쇼]에 불과하다. 사회의 악 풍조를 재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나라의 현대교회의 진보적인 참 모습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사회가 경박한 노래, 도발적인 노래, 관능적인 노래 등으로 속속들이 썩어 들어가기만 하는 이 때에 곡조에 있어서 이런 노래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성가(聖歌) 아닌 성가(性歌), 음악(音樂) 아닌 음악(淫樂)이 교회 안에까지 침투되고 말았으니 이 독버섯을 하루속히 제거해야겠다. 이것이 곧 교인과 교회음악과 사회를 구해내는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교회음악 창법과 유행가 창법의 구별
   넷째로 팝송 스타일이란 별로 새로운 것이 아니다. 흔히 재즈나 팝송 스타일로 된 곡을 현대적인 것 인양 착각하기 쉬우나 별로 새로울 것도 없다. 물론 리듬만은 새롭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리듬의 새롭다는 자체가 진정한 의미의 교회음악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까닭에 이것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멜로디에 있어서나 화성에 있어서나 순수한 교회음악과 별로 다를 것이 없으니 말이다. 다만 음악에 대해서 상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찬송가보다 훨씬 새로운 것으로 착각하게 될지 모르나 이것은 기타로 반주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한편 팝송을 포함해서 소위 재즈풍의 창법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은 듯도 하나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교회음악 창법과 유행가 창법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즈나 팝송스타일의 노래가 예배 때에 불리워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하는 목사들 중에는 근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교양이 없는 사람이 절대다수이기 때문에 일반신도들은 이러한 그릇된 신풍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현대화와 세속화의 구별
   다섯째로 예배 때에 재즈나 팝송을 부르는 것과 교회음악의 현대화는 전연 별개의 문제이다. 찬송가는 마땅히 현대화되어야 한다. 즉 20세기 후반기의 우리들의 생리에 맞는 찬송가가 작곡되어야 한다. 찬송가는 언제까지나 낡은 형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세속화와 현대화는 다르다. 혹자는 세속화라는 말 대신에 대중화란 말을 즐겨 쓰려 드는 모양이나 이것은 교회음악의 대중화도 아니요 그야말로 교회음악의 타락화라고 말해도 절대로 망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재즈나 팝송스타일의 것을 교회에서 부를 것이 아니라 현대적이면서도 우리의 생리에 맞는 민족적 스타일의 토착화된 찬송가가 많이 작곡되어야겠다. 이미 나는 [개편 찬송가]가 잘못 개편되었다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 물론 서양곡의 선곡, 역사(譯詞) 자체가 문제이나 이 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우리작품의 질에 있다. 즉 27곡의 우리작품 가운데 과연 한국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작품이 몇 곡이나 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일반신도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이 몇 곡이나 될 것인가? 찬송가란 모두가 서양 18세기풍이어야만 된단 말인가? 만약에 개편 찬송가에 좀 더 새롭고, 좀 더 우리 구미에 맞는 곡들이 많이 실려졌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재즈나 팝송 도입문제가 논의조차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듭 말하노니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세속음악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경거망동을 해서는 안될 말이다. 도리어 세속적인 요소를 교회 밖으로 몰아냄으로써 순수한 교회음악을 수호해야겠다. 정신위생상 해로운 음악이 교회음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70. 월간 [자유] 송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