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못 받느니라

나  운  영

   안익태 선생이 60고개를 눈 앞에 바라보며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지 어느덧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1932년 미국에서 애국가를 작곡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1936년에 그 애국가를 주제로 한  <코리아 환상곡>을 작곡하여 2년 뒤에 초연한 이래 줄곧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도 유럽 각국을 비롯하여 남미, 북미, 일본에서까지 - 외국인들로 하여금 애국가를 우리나라 말로 합창하게 하여 -  <코리아 환상곡>을 연주함으로써 민족과 조국의 이름을 세계만방에 떨치다가 홀연히 가고 말았으니 비통함을 금할 길 없다.
   선생은 왜 일찍 가셨을까? 그다지도 정열적이고 건강하던 그가 어찌하여 홀연히 가야만 했을까? 그가 주재하던 제 4회 국제음악제가 국내 음악인들의 불 협조와 냉대로 말미암아 졸지에 유산되고 말았을 때 그는 지병아닌 홧병을 얻어 영국에서의 자작 교향시  <논개> 지휘를 마지막으로 쓰러졌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끝내 스페인에 귀화하지 않은 애국자 안익태선생의 제 2의 고향인 마요르카에는 그가 죽은 직후 「안익태 거리」란 이름이 붙여졌다는 말을 들을 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못 받는다』는 성경말씀이 되새겨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선생이 가신지 10년이 되는 오늘날 우리 음악계는 과연 얼마나 변했는가? 세계적 지휘자를 잃은 우리 악단이 어찌 크게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풍운아요 망명객이었던 그의 유해가 아직도 이국 타향에 쓸쓸히 묻혀 있으니 이를 하루바삐 조국강산에 옮겨 모시는 일을 서두르는데 있어서 국민적인 여론을 일으켜야겠다.
   선생은 가셨으나 선생의 혼을 애국가를 국가 대신으로 부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길이길이 살아남을 것이다.

<1975. 9. 17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