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정경화와 런던심포니

나  운  영

   하이펫츠, 오이스트라프  이후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영국과 일본 악계를 뒤흔들어 놓은 우리의 정경화양이 지휘자 안드레 프레빈과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드디어 5월 5일 시민회관에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나라 음악사상 최대의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들 중에는 재빠르게 정양이 런던 데카에 취입한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원판 레코드를 사가지고 들으면서 새삼 놀랐던 차에 그의 실연을 직접 들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정양의 연주에 있어서 그 테크닉을 운운한다는 것은 쑥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계속해서 런던 데카와 계약을 맺고 세계 최 정상을 달리고 있는 연주가인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영국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을 때의 평을 읽어보면 그의 음악성이 뛰어난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즉 지난 4월 6일에 세상을 떠난 세기의 거장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 난곡 중의 난곡으로 알려진 바이올린 협주곡을 그토록 음악적으로 연주해 낸 까닭이다.
   정양은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의 제 3악장에 있어서 지금까지 세계 대가들이 연주한 것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연주함으로써 발랄하고 청신하고 섬세하고도 격정적인 여러 면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로서 이제까지 천재소녀로 불리어 왔던 정경화양에게 소위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란 칭호는 더욱 적당치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녀를 통틀어 - 아니 남자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5월에 정 트리오(정경화, 정명화, 정명훈)의 연주를 듣고 다음과 같은 평을 쓴 일이 있다.

   『이들은 그야말로 한국이 낳은 음악사절일 뿐 아니라 인간 국보라 해도 절대로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중략) 이들의 연주에 대해서 그 테크닉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마치 세기적인 대가 루빈슈타인, 아이작 스턴, 피아티고르스키에 대한 연주를 듣고 농평(弄評?)하는 것과 비슷하지나 않을 까?  이처럼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을 지니고 있는 젊은 연주가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새삼 「테크닉이 끝난데서부터 예술은 시작된다」고 한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의 명언이 생각났다. 이 말은 아직도 「테크닉 이전」, 「음악 이전」을 극복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국내의 음악학도들에게 다시없는 산 교훈이 될 것이다. (중략) 이들의 연주는 나이에 비해 매우 성숙하다. 이들은 이미 흔해 빠진 소위 천재 소년소녀의 영역을 벗어났다. 즉 본격적인 연주가, 대가로 성장할 수 있는 그 기틀이 완전히 잡혔으니 말이다. 끝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속성교육이 하루 속히 지양되고 철저한 기초교육과 종합교육이 실시되어야만 정경화 3남매와 같은 국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겠다. (경향신문)』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 58년전인 1913년에 홍안파선생이 김인식선생에게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여 192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어 로데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 9번>,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초연했고 더욱이 1933년 미국에서의 수학을 마치고 귀국독주회를 열어 부르흐,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초연한 이래 최호영, 채동선, 안병소 제씨를 통해 이 새로운 전통이 계승되어 오늘의 정경화를 낳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보면 「난파기념사업회」가 마련한 난파음악상에 있어서 첫 번 수상자에 정경화양이 뽑혔던 것도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5월에는 런던 심포니의 공연을 비롯하여 월터 하우직, 켄트너, 릴리 크라우스 등의 피아노 독주회와 레진 크레스팽의 독창회 등이 있었는데 특히 릴리 크라우스 연주는 조로증에 걸려있는 우리 악계에 많은 충격과 교훈을 던져 준 셈이다. 이와같이 외국 대가들의 연주를 서울에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 스승들의 시범연주를 거의 들어볼래야 들어볼 수 없는 우리의 이상풍토속에서 음악 학도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마다 1962년 안익태선생 주재하에 개최되었던 서울 국제음악제가 다시금 머리에 떠오른다.
   정부는 오랫동안 중단된 제4회 서울 국제음악제를 다시 계속해 주어 저속한 음악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백성들에게 고상한 음악, 건전한 음악을 들려줄 수는 없는가? 퇴폐적인 왜색 유행가와 경박한 째즈를 이 땅에서 몰아 내는 것이야말로 부정 축재를 일소시키는 선행조건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정경화는 우리의 국보요, 인간문화재요,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정진하여 세계적 대가에서 세기적 대가로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한편 국가의 뒷받침이 더욱 아쉽기만 하다.

 <월간 "세계"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