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현제명 박사론

나  운  영

   <고향생각>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산들바람> (산들바람이 산들 분다---),  <그집앞> (오가며 그집앞을 지나노라면--)등으로 널리 알려진 현제명선생은 홍난파선생과 더불어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두 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서양음악사를 더듬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 백우연 (1880~1950)          ● 정사인 (1881~1958)
             ● 이상준 (1884~1948)          ● 김인식 (1885~1962)
             ● 김형준 (1884~   ?  )          ● 박윤근 (1891~1989)
             ● 김영환 (1892~1977)          ● 홍난파 (1898~1941)
             ● 박태준 (1900~1986)          ● 안기영 (1900~1980)
             ● 채동선 (1901~1953)          ● 현제명 (1902~1960)
             ● 윤극영 (1903~1988)          ● 김재훈 (1900~1951)
             ● 계정식 (1904~1975)          ● 권태호 (1903~1972)

   이와같이 여러 음악가들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분이 홍난파, 현제명 두 선생이기 때문에 이 두 분을 비교하면서 그의 생애와 예술을 논해보려 한다.
   다음의 연표를 보면 현 선생은 홍 선생보다 5년 후배이나 미국유학은 현 선생이 홍 선생보다 4년 먼저 갔으며, 조선 음악가협회가 조직되었을 때 현 선생은 귀국 2년 후였고, 홍 선생은 미국유학 직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음악협회」(1931. 2. 11)의 조직 부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사장 : 현제명
  이   사 : 홍난파(상무), 김영환, 채동선, 독고선, 김인식, 안기영.
  발기인 : 현제명, 홍난파, 채동선, 안기영, 최호영, 독고선, 홍재유, 김원복, 윤성덕, 김인식.

연대

홍 난 파

현 제 명

1897
경기도 수원 남양에서 출생

1902

경북 대구에서 출생
1915
동경 음악학교 예과 입학

1922
연악회 창설

1923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1925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 개최
음악잡지 [음악계]발행 

1928

미국 Gunn음악학교 졸업(석사)
연희 전문학교 교수(1943년까지) 
1929
일본 동경 고등음악학원 본과 졸업 귀국,
중앙보육학교 교수,조선동요 100곡집(상편)출판

1931
조선 음악가협회 상무이사
미국 Scherwood음악학교 연구과 입학
조선 음악가협회 이사장
작곡집 제1집 출판 
1933
귀국, 이화여자 전문학교 강사
경성보육학교 교수, 조선동요 100곡집(하편) 및 조선가요 작곡집 출판, 홍 현 양씨의 작곡발표회 개최
작곡집 제 2집 출판
홍 현 양씨의 작곡발표회 개최 
1934
빅타 레코드 음악고문

1936
경성 중앙방송국 양악책임자,방송 관현악단 지휘자
어린이 찬송가 편집 출판
1937

미국Gunn음악학교에서 박사학위
1938
[음악만필] 출판

1941
별세

1942

콜롬비아 레코드 청반,적반 예술가
1943

경성음악학원 원장
1945

고려교향악단 이사장
경성음악학교 교장
1946

국립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장
1949

한국 음악가협회 이사장
1950

오페라 [춘향전]작곡 발표
1953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
1954

오페라 [왕자호동]작곡 발표
1960

별세
1965
대한민국 문화훈장 추서
대한민국 문화훈장 추서
   또한 「홍·현 양씨 작곡발표회」(1933. 10. 29)의 출연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독창--- 안보승, 채선엽, 이유선
   합창--- 경성 보육학교, 연희 전문학교
   지휘--- 홍난파, 현제명
   찬조--- 홍성유(바이올린 독주)

   이밖에도 두 분은 음악회 때마다 함께 출연했으니 그 기록을 더듬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중앙보육학교 주최 제 3회 교내음악 대 연주회」(1930년 11월 1일-바이올린 독주 -홍난파, 테너 독창 - 현제명
  2. 「조선 음악가협회 제 1회공연」(1931년 5월 28일)--혼성합창 지휘-현제명,바이올린 2중주 - 홍난파, 장동선. 반주 - 김원복
  3. 「경성 보육학교 주최 제 3회추계음악회」(1935년 10월 30일)---바이올린 독주 - 홍난파, 테너 독창 - 현제명.
   그러나 작품활동에 있어서 홍 선생은 동요, 가곡을 비롯하여 관현악곡(관현조곡), 바이올린 독주곡(하야의 성군, 동양풍 무곡 로만스, 애수의 조선), 관현악부 독창 조곡(나그네의 마음),  합창곡(봄노래)등을 발표했고, 현 선생은 가곡, 합창곡을 비롯하여 오페라 「춘향전」, 「왕자호동」등을 발표했다.

I
   선생은 성격이 명랑 쾌활하고 활동적이어서 연주활동이나 작곡활동 외에도 학교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을 창설했을 뿐만 아니라 재단법인 한국음악원 이사장, 국립극장 운영위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대한민국 예술원 영구회원, 한국 음악협의회 이사장(국제연합 음악협의회 소속),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부위원장 등 수 많은 직책을 맡았으며 한편 유네스코 국제음악회의, 동남아시아 국제 음악가회의, 미국 음악교육 연합회 제 2차 총회 등의 한국 수석대표로서 참석하는 등 세계를 누비고 다녔으니 국제적 인물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수완이 좋고 포용력이 강해 휘하에 이유선, 김성태, 문학준 이인범, 김생려, 정희석 등등 기라성과 같은 애 제자를 항상 거느리고 있었으며,  반대파까지도 포섭하는 비상한 능력이 있어 그야말로 음악계의 총사령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로 생각된다. 오늘날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이 눈부신 발전상을 보여주게 된 것이나 또한 국립 교향악단이나 서울 시립 교향악단이 교향악 운동에 주동적 구실을 하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공으로 돌린다 해도 이에 정면으로 도전할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 믿어지니 역시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선생은 많은 사업을 남기었으니 음악사업가라 해도 좋을 듯하나 뭐니뭐니 해도 선생은 사업가이기 전에 작곡가요 작곡가이기 전에 성악가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예를 들어 일제말기에 징용을 피하기 위해 「경성 후생실내악단」이 조직되어 지방 순회공연을 다닐 때의 에피소드를 한 토막 소개한다.
   단장인 선생이 마지막 프로에 독창을 하는 날에는 의례 마스크를 하고 아무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혼자서 무대 뒤를 조용히 걸어 다니다가  <니나> 또는 <희망의 나라로>,  <고향생각>등을  감명깊게 노래하는 것을 나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즉 노래하기 전에 목을 쓰는 것이 좋지 않다는 점과, 노래하기 전에 정신을 통일시킨다는 점 등 그 마음 자세를 우리는 본받아야 할 줄로 생각한다. 성악가가 연주 직전에 이야기를 많이 해서는 절대로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무언중에 가르쳐 주는 귀중한 예라고 생각된다.
   선생의 발성은 부드럽고, 아름답고,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언제나 인기를 독차지했었다. 또 이보다 몇 해 전인 1940년 일본 동경에서 나까다 우고가 지휘하는  <메시아> (헨델 작곡) 공연 때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이동일, 이동훈, 김순제 등과 함께 이 합창단원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테너독창자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 사람이 독창자로 초빙되어 연주하게 된 것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특히 메시아 곡에 나오는 테너의 레치타티브와 아리아는 선생의 음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되었다.

   선생은 많은 가곡과 두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고향생각>이나  <그 집 앞>은 소위 창가에 가깝고, <산들바람>,  <오라>는 서정 소곡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밖에 <니나>나  <나물 캐는 처녀>,  <희망의 나라로>는 건전한 의미에서의 또는 넓은 의미에서의 팝송(?)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니나>가 타나라 작곡의  <니나>와 제목이 같고 테마도 같으나 박자만이 달라 표절 혐의를 받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고,  <나물 캐는 처녀>가 슈베르트 작곡의 <들장미>(월계꽃)의 표절 또는 모작혐의를 받은 것은 수긍이 안간다. 이것은 아마도 악의에 찬 중상이라고 해두는 것이 옳으리라, 어쨌든 선생은 많은 가곡을 남겼으나 뭐니뭐니 해도  <오라> (앞산과 시내는 옛 같이 푸르고---)가 대표작이라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나는 이 노래를 중앙고보 1학년 때 김형준 선생(김원복 선생의 아버님, 가곡  <봉선화>의 작사자)에게 배웠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된다. 역시 성악가가 작곡한 노래가 되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고 부를 맛이 있어 좋다.
   한편 오페라 <춘향전>이 있는데 이것은 한국 최초의 오페라로서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며 따라서 우리나라 창작 오페라운동에 하나의 큰 자극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으니 즉 「작사 작곡의 문제」이다.  선생의 가곡 중에는 작사 작곡으로 된 것이 상당히 많다. 그런데 과연 작사가 먼저 된 것인지 작곡이 먼저 된 것인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윤극영 작곡의  <반달>이나 안기영 작곡  <마의태자>가 그렇듯이 그 당시에는 먼저 곡조를 써놓고 나중에 가사를 적당히 붙이는 예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부질없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찌 됐든 간에 가사와 곡조가 잘 어울리니 다행스러운 노릇이다.
   이와는 반대로 선생의 가곡 중에는 노산 이은상 선생의 작시로 된 것이 비교적 많은데 특히  <가고파>는 현행곡(김동진 작곡)과는 전혀 다른 맛이 나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행곡에는 시의 후반부가 생략되어 있는데 시가 너무 길어서 짤라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선생은 원시를 존중하여 끝까지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소위 통장가요(通章歌謠)식으로 작곡했기 때문에 매우 고전을 겪은 듯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제 참고 삼아 원시에서 생략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 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달음질하고
     물 들면 뱃장에 누워 별 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 가 알아보나
     내 몫엔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가 안기자 가 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 들어 죄없는 몸이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 동무 노 젓는 배에 얻어올라 키를 잡고
     한 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바람은 듣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거나 깨끗이도 깨끗이


   선생은 이 장편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안단테 4/4 - 아니마토 3/4 -알레그로 3/8 - 레치타티보 4/4 - 아리아 - 프레스토 등으로 속도와 박자를 바꿔 164소절이나 되는 대곡을 지었으니 그 노고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곡사상 이처럼 긴 곡은 또 없을 줄로 생각된다.
   끝으로「난파 기념사업회」나 「안익태 기념사업회」와 같이 「현제명 기념사업회」도 차츰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함으로써 선생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그 유지를 계승하는 후학들이 날로 증가되기를 바란다. 「현제명 기념관」 같은 것이라도 마련하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1973. 10. 새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