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패자(覇者)와 패자(敗者)

나  운  영

   '이번 여름 방학에는 열심히 공부 좀 해 봐야지'하고 벼르다가도 막상 방학이 돌아오면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헛되이 보내고 마니 아쉽기만 하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실컷 좀 놀아봐야지'하고 벼르다가도 막상 방학이 돌아오면 제대로 놀아보지도 못하고 무의미하게 또 방학을 보내고 마니 더욱 아쉽기만 하다.
   사람은 공부할 때와 놀 때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공부해야 할 때에는 놀아 버리고 놀아도 될 때에는 애써 공부해보려고 하니 이런 사람은 좀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 또는 악취미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까?
   방학 때에는 아예 교과서를 떠나서 일반 교양서적이나 소설책을 탐독한다든가 해수욕, 낚시질을 즐긴다든가, 높은 산, 깊은 숲을 찾아 헤맨다든가 하는 것이 좋다.

   중앙고보 재학시절 여름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것을 보면 나 역시 모처럼의 방학을 무의미하게 보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방학이 되어 회룡사를 찾아가 소위 입학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굳은 결심을 하고 한달 가량 지내 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새벽 4시만 되면 스님의 목탁소리에 단잠이 깨고 새벽 산보 겸 산을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져서 아침밥이 잘 먹힌다. 감자 투성이의 밥을 실컷 먹고 나니 책상 머리에 앉아 공부를 하려 해도 졸음이 와서 못 견디겠다. 냇물에 머리나 감고 정신을 차려야지 하고 머리를 감고 와도 역시 졸음이 오니 어찌하랴. 그럭저럭 점심시간이 되니 책임지고 먹고 이번에는 소화도 시킬 겸 또 다시 산을 한 바퀴 돌아들어와 좀 피곤해서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난다는 것이 파리 등살에 깨어보니 벌써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저녁밥을 빨리 먹어치우고 밤 늦게까지 공부해야지 마음 먹고 앉아있는데 방문을 닫으면 더워 못 견디겠고 문을 열어 놓으면 불나방, 모기 등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에라 밖에 나가 별 구경이나 하고 들어오자 하고 나가니 거기에도 모기가 따라 붙는다. 실컷 물린 뒤에 방에 들어와 자리를 깔고 누우니 이번에는 복병(빈대)과 빨치산(벼룩) 때문에 못 견디겠다. 자는 둥 마는 둥 시달리다 시계를 보니 4시 직전이다. 또 목탁소리가 들려올 때가 되었구나 …. 이렇게 해서 하루, 한 주일, 한 달을 흘려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내일부터는 또 지긋지긋한 개학이다. 시험공부는 고사하고 방학숙제도 제대로 못했으니 이 일을 어찌하랴. 형의 도움을 받아 부랴부랴 밤새워 숙제를 해 가지고 학교에 가 보니 제각기 방학 동안에 즐겁게 놀았던 일로 얘기 꽃이 핀다.
   친구들의 얘기를 재미있게 듣다보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과연 나는 방학동안에 무엇을 했나? 공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실컷 놀아 보지도 못했으니 말이다. 차라리 친구들처럼 놀았다면 얼굴도 타고 몸도 튼튼해졌을 것을 ….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다.

   방학 때에는 실컷 놀자. 그 대신 개학 후에 열심히 공부하면 된다. 하기야 방학이란 학교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결코 학문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방학 때도 몇 시간씩 공부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 몇 시간에 신경을 쓰다 보면 마음 편히 놀 수가 없으니 차라리 책임지고 놀아 버리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 '공부하며 놀고, 놀면서 공부하자'라는 말이다.  아무리 방학 때라고 해도 하루종일 놀고만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침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놀고, 밤에는 쉬고 하는 생활이야말로 공부하면서 놀고, 놀면서 공부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하루 놀고, 하루 쉰다'라는 말이 나도는 모양인데 이는 논다는 뜻과 쉰다는 뜻을 혼동하는데서 온 우스개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 식대로 말한다면 공부란 정신적 노동이요, 논다는 말은 육체적 노동이요, 쉰다는 말은 정신적 및 육체적 휴식 - 다시 말해서 잠자는 것을 뜻한다.
   공부하며 놀고, 놀면서 공부한다면 개학이고 방학이고 상관 없다. 남들이 모두 놀기만 할 때 조금씩이라도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이 비결을 명심하자, 고갯길에서 자동차의 발동을 꺼뜨리지 마라. 방학이라고 해서 놀기만 하면 개학 후에 다시 발동 걸기가 힘이 든다. 흔히 입시 지옥에서 구출된 햇병아리 대학생들이 소위 미팅이나 데이트에 홀려 첫 학기를 정신없이 흘려 보내 버리는 까닭은 공부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무릇 기계는 돌아가지 않으면 이내 녹이 스는 법이다. 일단 녹이 슬면 그 녹부터 닦아낸 다음에 기름 칠을 해야만 비로소 다시 쓸 수 있다. 이처럼 우리들도 녹슨 인생이 되지 말아야겠다.

   골동품은 녹이 슬수록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사람이란  골동품이 되어서는 값이 없다. 나이야 많건 적건 간에 이 급변하는 세대에 있어서 새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온갖 태세를 갖추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요, 인생의 패배자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골동품적 존재만은 겨우 면했다 하더라도 그만 녹이 슬어 버리면 만회하기가 무던히도 힘이 든다.
   방학을 뜻있게 보내는 사람은 승자요, 방학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은 패자이니 - 이 인생의 갈림길에 서서 우리들은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1973. 8. 월간 수필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