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민속음악에 쏟은 정열

나  운  영

   삼다이설(三多異說)    
내가 제주도 민요를 수집해야겠다고 느꼈던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어서인지 좀처럼 그 기회가 오지 않았었다. 나날이 육지와의 교류가 빈번해지니 순수한 제주도 민요가 변질되거나 차차 없어져만 갈 것같은 느낌이 들었던 까닭에 하루 바삐 가봤으면 하고 별렀어도 그 꿈이 실현되기까지는 무려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1966년 여름 드디어 나는 연세대학교 대학원 연구비를 받고 제 1차 민요수집여행을 떠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주도는 濟州島라고만 쓰는 줄로 알았었는데 막상 가보니 도(島)가 아니라 도(道)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제주도야말로 민요가 무진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제주도를 삼다도라고 한다.  즉 바람 많고, 물 많고, 여자가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1차 여행에서 나는 내 나름대로 삼다(三多)를 생각해냈다. 즉 노래가 많고, 비석이 많고, 학교가 많은 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말로 제주도 민요라고 하지만 그 가사는 옛날부터 수집 연구되어왔는데 곡조는 별로 수집 조차되지 못하고 있었으니 우선 다른나라 사람들이 손을 뻗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착수해야 되겠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에서 제 2차, 제 3차에 걸쳐 수집한 것이 무려 4백곡 이상이 되었다. 이 민요를 모조리 수집하려면 아무래도 제주도에 본거지를 두고 년중 무휴로 본격적인 작업을 벌여야겠다는 각오가 생기게 되었다.

   제주도민요는 육지부의 민요와는 너무도 다르다.
   첫째로 육지부의 것과 같은 소위 창 민요가 거의 없고 모두가 노동요이다. 다시 말해서 직접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악기 반주도 없이 여럿이 함께 순전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특색이다.
   둘째로 그 곡조가 몽고와 일본의 영향이 짙다. 그런데 일본보다도 몽고의 영향이 훨씬 짙은 것은 30년간이나 몽고의 지배를 받았던 까닭이다. 또한 흥미있는 것은 오끼나와가 지역적으로는 비교적 가까우면서도 아직까지 조사해 본 결과로는 그 영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셋째로 모두가 처량하고 애처롭게 들리는데 이는 마치 제주도의 슬픈 역사를 말해 주는 듯하다.
   넷째로 가사가 너무나도 길어 대개의 경우 혼자서 부르지 않고 서로 교대로 부른다. 물론 후렴이 없는 곡은 토막토막 끊어서 번갈아 노래하기 때문에 일하면서 조금도 피곤을 느끼지 않게 마련이다.


   최초의 충격
   이상과 같이 육지부 민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진 민요가 날로날로 소멸되어만 가니 이를 잘 부르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부지런히 녹음, 수집해 두어야 할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즉 지정도 되지 않은 무형 문화재가 사라지면 다시는 그 노래를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봄 나는 민속음악을 전공한다는 두 사람의 일본 음악가로부터 제주도 민요를 들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즉 외국사람들이 우리 제주도 민요에 손을 대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먼저 우리 손으로 그 많은 민요를 모조리 녹음, 수집하고 다음에 널리 외국사람에게 들려주어야 하겠다는 사명감이 나의 마음 한 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내가 [한국 민속음악 박물관]을 제주도에 세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 박물관은 북 제주군 한경면 용수리 - 지난 봄에 찾아왔던 황새 다섯 마리로 이름이 난 용수저수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박물관 대지로 2천여평을 사들여 우선 20여평밖에 되지 않는 박물관 별관을 지었다.
   여기에 공후, 아쟁, 거문고, 가야금, 해금, 대금, 중금, 퉁소, 단소, 당피리, 향피리, 태평소, 양금, 장구, 북, 징, 박 등 20여종의 악기와 30여권의 악보와 40여권의 악서 그리고 옛날 S.P 국악 레코드 1백여장, 4백여곡이 수집된 녹음테이프 등을 진열해 놓고 지난 8월 20일 역사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민속 음악박물관의 개관식을 올렸던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같이 푸른 뜻을 품고 일단 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이번에 지어 논 건물은 말하자면 제 3 별관에 불과하니 앞으로 제 2 별관, 제 1 별관을 지은 다음에  본관을 지어 놓고야 말 각오가 서있고 보니  「시작이 반」이라는 말의 참뜻을 조금 알게 된 듯 싶다.
   1백 50년이나 된 기와를 얹은 돌집의 박물관과 이밖에 순 제주도 초가로 - 말하자면 유스호스텔을 지어 놓았는데 이는 관광객이나 학자들이 며칠씩 묵으면서 관광, 연구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려는데 뜻이 있다. 이 마을에는 스레트 지붕이나 함석 지붕같은 것을 철저히 피하고 제주도식 민속 집을 지어 하나의 민속촌을 만들려 한다.
   이 박물관은 관람료를 받지 않기로 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내 나라의 고유예술 문화를 세상에 알리고 자랑하는 일에 관람료가 웬 말인가?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운영해 나갈 것이냐? 나는 박물관 운영을 위해 3천평의 밭을 사 모아 밀감(감귤)을 심어놓았으니 머지 않아 밀감의 수익으로 자체운영을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박물관은 우리나라 악기, 악보, 악서, 레코드, 녹음테이프만을 진열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동남아 각국의 모든 자료를 수집 진열할 계획이다. 그래야만 민속음악을 비교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성있는 민속음악
   다시 말해서 남의 나라의 것과 비교해 보아야만 우리 것의 특이성, 우수성, 고유성 등을 재 인식할 수 있는 법이다. 현재 이 박물관에는 일본에서 보내온 샤꾸하찌 2점이 이미 진열되어 있는데 이밖에도 일본의 샤미생, 비와, 고도 등을 비롯해서 자유중국의 생(笙), 보르네오의 라부 등등이 오는 중에 있다. 앞으로 동남아 각국의 자료를 수집하려면 우선 재력이 뒤따라야 하나 이 재력보다도 더 아쉬운 것이 있으니 곧 문공부 당국의 적극적인 협조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국내 외에 주재하고 있는 대사관이나 영사관으로 하여금 귀중한 자료를 희사하고 기부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야 되겠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고유악기와 교환하는 방법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1952년에 부산 임시수도에서 「한국 현대음악학회」를 창립했고 정부 환도 이후에 이의 발전적 해체에 따라 「한국 현대음악협회」를 창립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서양현대음악의 소개, 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한국적인 현대음악 내지 현대적 스타일의 한국음악의 창조를 위하여 내 나름대로 모색에 모색을 거듭해 오고 있거니와 작곡 활동과 민속 음악박물관 설립 운영이 전연 별개의 것인양 생각되는 모양이어서인지 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즉 「세계성을 띤 한국 민속음악을 창조하려면 먼저 내 나라의 민요에서 소재를 발굴한 다음에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고.   흔히 국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들을 여러 사람이 해오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의 관념적인 것에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실제로 악기, 악보, 악서, 레코드, 녹음테이프 등을 수집해서 종합적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면 단지 그러한 자료를 수집, 보존하는데만 의의가 있을 뿐이다. 물론 수집, 보존하는데 박물관의 존재의의가 있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연구 발전시킴으로써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만 박물관의 보다 큰 의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첫째로 외국사람들보다도 우리 고유의 음악에 관해서 별로 관심조차 없는 듯한 우리나라 작곡가 및 작곡학도들에게 , 둘째로 동양 3국에 있어서 중국, 한국, 일본음악을 비교 연구하려는 학자들에게, 셋째로 우리나라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려는 분들에게, 넷째로 우리나라 악기의 개량, 개조에 뜻있는 분들에게 이 박물관을 개방하고자 하는 바이다.

 <1973. 19. 월간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