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악처(惡妻)와 악처(樂妻)
-바하,모차르트,슈만의 아내를 중심으로

나  운  영

  『음악을 즐기는 것은 여성의 본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처럼 모두들 음악을 몹시도 사랑하는 까닭에 해마다 음악대학의 문을 두드리는 여대생들이 늘어만 가고 있어 각 음악대학 학생수의 3분의 2이상을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자랑(?)인가 봅니다. 한편 음악대학을 졸업하는 학생 수가 한해에 500명이니 자그마치 300여명의 여성음악가가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연주나 작곡활동을 계속하는 사람은 10명 미만이니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물론 음악을 즐기는 것은 여성의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여성은 모두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즉 자기에게 소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지도 않고 무턱대고 음악을 전공하기 시작하는 까닭에 성공하는 자보다 실패하는 자가 훨씬 많은 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는 것은 좋은 취미이며, 하나의 교양으로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분명히 즐거운 일이나 음악을 전공하든지, 직업으로 삼는 것은 참말로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중력) 흔히 여성들은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생활로 들어감과 동시에 전공을 소홀히 하게 되거나 결혼 후 가정생활로 들어가기가 무섭게 전공을 졸업(?)해 버리는 사람이 대다수이니 이는 절대로 개인적인 문제라고만 볼 수 없는 - 실로 중대한 일인 것입니다. (중략) 이미 「여성과 피아노 교습소」란 글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만 연주가가 되어보겠다는 꿈보다도 결혼 후 집안에 교습소나 차려놓고 말로만 적당히 가르치는 무책임한 직업인이 될 바에는 아예 음악을 전공하려 들지 말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상은 「여성과 음악」이란 나의 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1965. 11.25. 중앙일보 참조)

   서양음악사를 더듬어 보면 악성들의 가정생활에 관해서 언급한 기사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대체로 짐작이 가지만 그들의 가정생활이 과연 얼마나 원만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헨델을 비롯하여 베토벤, 슈베르트, 멘델스존, 브람스 등은 소위 독신주의자였으니 더 논할 필요가 없으나 바하, 슈만, 바그너, 바르토크 등의 아내는 대표적인 양처형에 속한다고 하며 이밖에 베를리오즈, 리스트, 쇼팽, 차이코프스키, 드뷔시 등은 결혼생활이 원만치 않았거나 이혼을 했거나 해서 가정생활이 매우 복잡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나는 악성 중에서 세 사람을 택해서 좀 구체적으로 논해보고자 합니다.
   바하의 아내
   바하(J. S. Bach)는 35세 때에 아내를 잃고 안나 막달레나를 후처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안나 막달레나는 성악가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보를 깨끗이 할 줄 아는 여인이어서 남편의 작품을 정성껏 사보했다고 합니다. 대체로 작곡가들 중에는 비교적 악필이 많아서 제 삼자가 쉽게 알아보기조차 힘들기도 하려니와 작곡가들은 자기 작품을 사보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특이한 습성이 있는 법인데 자기의 작품을 이해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손수 사보까지 해주는 아내를 맞이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행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바하의 칸타타 300곡 중에서 190곡은 모두 안나 막달레나가 13명의 아이들을 기르면서 사보를 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그 작품이 남아있어 연주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바하의 아내는 가정적으로 매우 애정이 깊은 정숙한 여성이어서 남편의 바쁜 공적, 사적생활에 있어서도 그 내조의 공이 컸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모차르트의 아내
   모차르트(W.A. Mozart)는 21세 때에 파리에서 연주여행 도중 실연을 하고 자기 연인의 동생인 콘스탄쎄와 결혼한 것은 26세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콘스탄쎄는 낭비하는 버릇이 있고 경제적인 채산이나 처세술이 없는 자기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경제 관념이 없어서 항상 가난한 살림살이에 허덕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땔 석탄이 없을 때에는 긴긴 겨울 밤을 춤을 추며 지샌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쎄는 남편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고사하고 남편을 별로 존경하기 조차도 않았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서로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모차르트를 숭배하는 나머지 줄을 지어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본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남편이 불출의 대 천재였던 것을 조금이나마 깨달았다고 합니다. 9년동안이나 같이 살던 남편의 예술을 이해는커녕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바가지를 긁었다는 사실을 놓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모차르트의 아내는 아마도 악처(樂妻) 아닌 악처(惡妻)로서 후세에 길이길이 그 이름이 남아있다는 것이 바하의 아내와는 대조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슈만의 아내
   슈만(R. Schumann)이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수였던 프리드리히 뷔크의 가정에 출입하며 레슨을 받다가 그의 따님인 클라라를 처음 만났을 때가 슈만은 18세요, 클라라는 9세였다고 합니다. 당시 클라라는 아름답고도 총명한 - 그야말로 천재소녀 피아니스트였던 것입니다. 슈만은 26세때 이미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이 높던 클라라와 뜨거운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클라라의 부친은 이 두 사람의 연애를 절대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클라라는 날로날로 명성을 떨치는데 슈만은 아직 이름도 없는 가난한 작곡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슈만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30세 때에 결혼소송을 제기하여 이에 승소함으로써 그 이듬해에 드디어 결혼을 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슈만은 결혼 한 그 해에 138곡의 주옥과 같은 예술가곡을 작곡했던 것입니다. 즉 「시인의 사랑」, 「여자의 사랑과 생애」를 비롯하여 「피아노 5중주곡」, 「피아노 콘체르토」 등은 결혼의 행복에 젖은 가운데 작곡된 그의 필생의 대작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슈만은 항상 아름답고 ,총명하고, 정숙한 아내의 격려를 받아가면서 작곡하였으니 클라라야말로 슈만에 있어서는 매력의 원천이요, 작곡하는데 있어서는 영감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는 아침시간에는 작곡에 몰두했고 좀 피곤을 느끼면 사랑하는 클라라와 산책을 즐기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작곡을 하곤 했습니다. 한편 클라라가 피아노 공부를 하거나 레슨을 할 때에는 슈만은 책을 읽으면서 휴식시간을 보냈다고도 합니다. 39세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보람있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수월한 작곡과 또 이렇게 행복한 일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라고 실로 클라라는 명 연주가로써 남편의 작품을 가장 훌륭하게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남편을 도와준 양처였다고 합니다. 즉 남편의 예술을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고 남편이 작곡하는데 있어서 크게 작용을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남편의 작품이 난해한데도 불구하고 초연에 있어서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남편에 대한 깊은 애정이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슈만이 46세 때에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는 여류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여 죽은 남편의 작품은 물론 베토벤, 쇼팽, 브람스 등의 작품을 널리 소개함으로써 그 진가를 인정 받게 한 공적이 컸던 것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바하, 모차르트, 슈만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안나 막달레나는 13명의 자녀를 거느리면서 남편의 작품을 사보했으니 현모양처의 표본이라 할 수 있으며 콘스탄쎄는 경제관념이 없이 알뜰한 집안살림을 못했으니 악처라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듣게 되었긴 하나 마치 소크라테스나 링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악처 덕분에 모차르트도 결과적으로는 위대한 작품을 남긴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콘스탄쎄도 그런 점에 있어서 또한 내조의 공이 컸다고 말해두는 것이 좋을 듯도 하며, 클라라는 남편의 작품을 직접 초연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작품을 쓰는데 있어서 그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은 단순히 현모양처라고만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슈만이 신경장애로 말미암아 44세 때에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가 다행히도 구조된 뒤로 정신착란이 계속 되어 죽을 때까지 2년동안은 정신병원에서 거의 폐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어도 끝까지 정성된 간호를 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의 제자와도 다름없는 미혼청년인 브람스와의 사이에 조금도 스캔들 없이 음악을 통한 교류를 함으로써 진실된 아내,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것을 생각해보면 생각해 볼수록 클라라야말로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여러분 가운데서 안나 막달레나 또는 클라라와 같은 현모양처, 진실한 여성, 정숙한 여성이 많이 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 2의 바하, 제 2의 슈만이 나오고 또 못나오는 것은 오로지 여러분에게 달렸다고 해도 과히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1970. 서울여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