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집 '스타일과 아이디어'
 

한국음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나  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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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년 서양 음악이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우리나라에는 소위 '국악과 양악', '국악인과 양악인'이라는 어휘가 생겨났다.
   즉 아악, 당악, 향악, 속악으로 나뉘어지는 국악에 전혀 이질적인 서양의 찬송가가 끼어 들어 급속도로 퍼짐으로 말미암아 국악과 양악, 국악인과 양악인 사이에 갭이 생겨지게 된 것이다.
   실로 국악과 양악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허다하다. 첫째로 악기의 조율법이 다르니 중국음악이 순정율로 조율되는데 비하여 한국음악(국악)은 순정율과 매우 흡사하긴하나 좀 다른 -우리고유의 조율법에 의해 조율되며 이는 양악에 있어서의 평균율과는 전혀 틀린다. 둘째로 악기의 음색이 다르고, 연주법이 다르며, 셋째로 박자와 리듬이 다르고, 넷째로 국악은 화성이 없는데 비해 양악은 화성이 다양하며, 다섯째로 악곡형식이 다르다.
   이처럼 국악과 다른 양악이 이 땅에 뿌리를 깊게 뻗은지 90년을 맞이한 오늘 소위 신음악- 다시 말해서 한국양악을 나는 3기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제1기 (1885~1945)
     제2기 (1945~1969)
     제3기 (1969~현재)
   첫째로 제1기는 선교사에 의해 찬송가가 보급됨에 따라 교회음악과 학교음악이 부흥되었고 마침내 연희 동산에서의 관현악 운동에 이르기까지 발전된 시기로서 양악의 수입기, 태동기, 요람기라 말해도 좋을 것이며 이 시기의 대표인물로는 김인식, 이상준, 김형준, 박우용을 비롯하여 김영환, 홍난파, 현제명 등을 손꼽을 수 있다.
   둘째로 제2기는 8.15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교향악운동, 합창운동, 오페라운동과 한편으로 예술가곡, 합창곡, 관현악곡 등의 창작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로서 양악의 정착기라 말해도 좋을 것이며 이 시기의 대표 인물로는 박태준, 이인선, 임원식, 김생려, 안익태를 비롯하여 김성태, 김동진 등을 손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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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한국음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제목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위에서 언급한 제1기와 제2기는 과거에 속하고 제 3기는 현재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음은 물론이나 이를 다시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아래와 같이 말할 수도 있으리라.
     제1기 - 양악의 섭취시대
     제2기 - 양악의 토착화시대
     제3기 - 양악의 현대화시대
   첫째로 제1기는 양악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시기로서 국악은 아예 외면해 버리고 양악을 공부하는 것 그 자체만을 목적삼고 활동한 때이므로 이 시대의 작가로서는 민족음악 창조에 대한 뚜렷한 의식 은없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둘째로 제2기는 국악에 대한 이해가 점차 깊어짐에 따라 민족음악 창조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우선 국악에서 민족적 내지 민속적 소재를 발굴, 발전시킴으로써 토착화를 위해 부심하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과거의 러시아 5인조나 프랑스 6인조의 정신을 본받아-이 시대의 작가로서는 양악을 한국적으로 섭취함은 물론 국악에서 소재를 색출하여 그 멋과 맛이 풍기는 작품을 우선 써야겠다는 목적의식이 뚜렷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제3기는 작품이 아무리 한국적이라 해도 현대성을 띠지 못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음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기에 양악에 있어서의 현대적 내지 전위수법을 연구, 섭취함으로써 한국적 아이디어와 현대적 스타일이 결부된 작품을 써야 하며 이런 음악이 아니고서는 국제무대에서 각광을 받을 수 없다는 신념이 굳어진 사람이 아니면 오늘의 작가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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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은 먼저 토착화되어야 하며 다음으로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나의 지론이다.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려는 자가 있을 것이다.'토착화와 현대화에 있어서 그 순서는 바뀌어도 무방하지 않겠느냐?'고---. 단순히 생각할 때 그 순서 자체가 문제될 까닭이 없을 듯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즉 현대화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민족이니 국가를 초월한-범 세계성을 띤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민족, 내 나라의 전통, 고전에 뿌리 박은 것을 가지고 현대화하는 것은 가능해도 이미 범 세계성을 띤 것을 토착화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나의 작품을 통해 간단히 설명하련다. 나의 작품 중에서 토착화에 대해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가곡 <접동새>(김소월 시)와 <가는 길>(김소월 시)이고, 성가 <시편 23편>과 부활절 칸타타 중에서 <골고다의 언덕길>(김병기 작시)과 <이제 이곳에서>(김상돈 시)이며 국악의 현대화에 대해 고심한 증거가 나타난 것은 <교향곡 제3번>과 <교향곡 제9번>과 <교향곡 제13번>이다. 특히 <교향곡 제3번과 제9번>은 국악의 산조 형식으로 작곡되었으며, 아울러 <교향곡 제9번>은 '아악의 현대화'요, <교향곡 제13번>은 '농악의 현대화'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작품 중에서 가곡, 성가에서는 현대성이 비교적 희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보다 현대적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 못하리라. 이와 관련해서 세계적 작곡가 Frank Martin이 나에게 보내온 글을 인용코저 한다.

   「나는 당신이 현대음악에 대해서, 작곡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마 이것은 현대 작곡가에게 공통된 문제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처럼 두 문명, 두 문화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고민이 클 것입니다. (중략) 당신은 민족적인 모든 것을 이제부터 찾아내야 하고 만들어내야 할 처녀지를 앞에 놓고 있는 까닭입니다. 당신은 우리 서양의 전통적인 음악을 더 배우고 연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마음 놓고 출발해야 하며 당신 자신의 음악, 당신 나라의 음악을 반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우리 서양음악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당신들의 본질에 맞는 것을 솔직하게 탐구하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창작을 할 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하 생략)」
   이 글은 한국적인 작품을 쓰려는 사람과 현대적인 작품을 쓰려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귀한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지금까지 양악 90년사에 있어서 그 제2기와 제3기에 걸쳐 살면서 우리 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논해 왔다. 그러면 과연 우리음악의 미래에 관한 전망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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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음악의 전망에 앞서 특히 제1기에 대해서 재론할 필요성을 느낀다. 즉 1945년까지 60년간에 있었던 중요한일을 연표를 통해 더듬어 보기로 한다.
  1885년  아펜셀러, 언더우드 선교사가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입국함.
  1892년  최초의 [찬미가]가 출판됨.
  1901년  군악대가 창설됨.(Franz Eckert가 입국 지도함)
  1904년  창가가 학교교과과정으로 처음으로 삽입됨.
  1910년  학부창가집이 출판됨. 이화여전에 음악과가 창설됨.
  1913년  조선 속곡집, 보통 악전대요(이상준 저)가 출판됨.
  1915년  조양 구락부가 설립됨.(우리나라 최초의 음악전문학원으로서 조선악과 서양악과를 둠)
  1918년  창가집(이상준 저)이 출판됨. 연희전문학교에 음악부가 창설됨.
  1920넌  봉선화(홍난파 작곡)가 발표됨.
  1822년  정악 구락부가 설립됨.
  1924년  홍난파 바이올린 독주회가 개최됨.
  1925년  정악 구락부가 설립됨.
  1926년  중앙 악우회가 조직됨, 하기 악리강습회가 개최됨.
  1928년  경성제대 관현악단 제 1회 연주회가 개최됨.
  1929년  연전에 현제명선생이 초빙됨, 연전 관현악단이 발족됨, 연전 주최 제1회 정기 연주여행이 개최됨.
  1930년  연전주최 제1회 추기 음악회가 개최됨.
  1931년  연전주최 제1회 남녀 하기 음악강습회가 개최됨.
  1932년  조선음악가 협회가 결성됨, 연전주최 제1회 전 조선 중등학교 현상 음악회가 개최됨.
  1933년  현제명, 홍난파 작곡발표회가 개최됨, 경성 관현악단이 조직됨.
  1936년  경성 방송 관현악단이 조직됨.(홍난파 지휘)
  1937년  경성 음악 전문학원이 창립됨.
  1939년  동아일보 주최 제 1회 전 조선 창작 작품 발표 대 음악제가 개최됨.
  1940년  조선 교향악단이 창립됨, 이인범 선생 전 일본음악콩쿨에서 수석 입상함.
  1942년  경성 후생 실내악단이 조직됨.
  1943년  현제명 선생 연전을 사임함.
  우리는 이 연표를 통해서 양악이 찬송가를 통해서 들어왔으며 홍난파 선생의 활약과 특히 연전 음악부가 현제명 선생 지도하에 눈부신 활동을 함으로써 음악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동시에 이것이 제2기에 있어서의 교향악운동, 오페라운동 등등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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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양악은 90년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우리는 국제무대에 수 많은 음악가를 계속 배출하고 있다. 특히 정경화의 경우 그는 현존하는 세계 7대 바이올리니스트 중 하나에 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런던 심포니를 이끌고 일본에 가서 연주했을 때 일본의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격찬하면서도 '일본에 정경화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는 원인이 무엇이냐? 과연 교육의 잘못이냐? 그렇지 않으면 음악성이 모자란 탓이냐?'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거듭하던 끝에 일본 사람은 음악성이 한국사람보다 뒤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음악에 있어서 일본이 우리보다 최소한도 50년은 앞서 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상위 입상한 자가 없지 않은가?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음악성의 우수성이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자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만심을 갖는 것은 절대금물이다. 우리에게도 말 못할 만한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대성한 우리 연주가들이 모두 어렸을 때 외국에 가서 거의 처음부터 새로 배우다시피 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국내에서만 배워서 대성한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또 그 원인이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기초 훈련을 소홀히 하는 까닭에 마치 뿌리없는 나무와도 같아서 처음에는 콩쿨에도 더러 입상되나 그것도 한때 뿐이고 곧 시들어 말라 버린다.
   그러므로 아예 나무를 뽑아 버리고 새로 심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학부형 중에는 콩쿨병 환자(?)가 많은 듯 싶다. 개화기에 해당되는 미래를 바라보며 통감하는 일은 첫째로 올바르게 기초를 닦는 문제이다. 속성교육은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교육이라 말할 수 없다.
   둘째로 개화기의 우리 연주가들은 항상 국제 음악문화교류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다. 우리가 아무리 베토벤을 잘 연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화교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의 작품을 외국에서 연주할 때 비로소 문화교류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들은 남의 나라의 문화만을 선전해 주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들이 외국에 가서 자기나라 작품만을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때마다 그들이 주체성과 긍지를 가진데 대해 새삼 머리가 수그러진다. 나는 몇 해 전에 [음악과 민족성]이란 제목의 글에서 '독일사람은 독일노래를 가장 잘 부르며 또 잘 부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머지 않아 성장기를 지나 개화기를 맞이할 이 마당에서 우리 연주가들은 우리 작품을 즐겨 연주하는데서 생의 의미를 찾을 줄 알아야겠다.
 셋째로 우리나라 작곡가는 우리스러운 곡을 써야 할 것이다. 물론 세계의 흐름에 대해 항상 민감하여야 하나 '외국 2세적인 작품', '국적이 분명치 않은 작품'을 써서는 안될 일이다. 누가 듣더라도 동양 3국에 있어서 20세기 후반기의 한국 사람이 지은 곡이라는 것이 손쉽게 드러날 수 있는 곡을 써야만 의의가 있지 않은가---. 국악의 멋과 맛이 풍기는 작품을 쓰지 않는 이상 외국인의 모방에 그치고 말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외국문화와 외국작가를 선전해 주는데 그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넷째로 우리나라의 음악교육을 근본적으로 바로 잡아야겠다. 초등학교에서부터 국악을 외면하고 양악만을 가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부터 국악을 들려주고 가르쳐야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인도 사람 모양으로 외국음악은 전혀 가르치지 않고 인도 음악만을 가르쳐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6대 4나 적어도 5대 5 비율로 국악을 가르쳐야만 민족정서를 항상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음악대학에 있어서 국악전공을 제외하고는 고작 국악개론과 국악감상 정도를 교과과정에 넣어 구색을 갖추고 있는 형편이니 이래가지고 어찌 한국음악대학의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독일이나 이태리 음악대학의 출장소(?)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음악을 전공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고 막연히 외국 것만을 숭상하고 흉내 내려 드는 그 지각없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뜯어 고쳐야 한다. 우리나라 음악대학에서 국악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외국에 가서 외국인에게 배워야 한단 말인가? 우선 초등학교부터 단계적으로 국악을 가르쳐 국악의 멋과 맛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야겠다. 내 민족, 내 나라의 음악적 전통을 모르면서 외국 것만을 상대하려드는 그 그릇된 정신을 바로 잡아야겠다.
   여기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국악과 양악의 차이점이 많다는 점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악이 양악에 비하여 너무나도 이질적이라고 생각되어 이것을 어찌 동시에 가르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국악과 양악이 다른 점은 악기의 조율법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은 양악의 평균율을 기준으로 하면서 순간적으로 조절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양악에 있어서 예를 들어 바이올린 연주자가 평균율로 조율되는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면서도 바이올린만은 순정율로 연주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이는 별로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부 국악인은 아직까지도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양악의 평균율로 조율하는 것은 큰 잘못으로 알고 몹시도 꺼려하는 모양이나 이 고집을 버리지 않는 한 국악도, 한국 민족음악도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겠다. 좀 넓은 견지에서 말할 때 비단 우리의 국악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헝가리의 민속음악도 본래 그 조율법은 평균율과 같지 않으나 음악발전을 내다 보면서 평균율에 맞추어버린 사실을 우리는 주시해야겠다. 우리가 흔히 듣는 바르토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소나타에서 평균율과 다른 미분음적인-그러나 매력적인 멜로디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지 않은가---. 온 세계가 이미 평균율을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각각 자기 나라의 민속음악의 멋과 맛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 이 때에 우리 국악만이 순종율에 가까운 우리네의 조율법을 고집한다는 것은 고집을 위한 고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루바삐 국악과 양악, 국악인과 양악인 사이에 갭을 없애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국악의 현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나아가 우리 음악의 개화기에 대해서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신음악 90년사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를 통해 본 미래를 문자 그대로 개화기로 내다본다는 것은 우리 음악계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74.12. 16. 연세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