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프랑크 마르탱

나  운  영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분 가운데 두 사람을 고른다면 첫째는 홍난파(1898~1941)요, 둘째는 프랑크 마르탱(Frank Martin, 1890~1974)이다.
   그 중 마르탱은 스위스가 낳은 세계적 현대 작곡가이다. 그러면 마르탱은 내 인생에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 … 1956년 9월 나는 그의 66회 생일을 축하하는 동시에 나의 가곡집 『아흔아홉 양』과『다윗의 노래』에 대한 비평을 부탁하는 서신을 띄운 일이 있었다.
   전혀 면식도 없는 한국의 청년 작곡가에 대해서 무슨 관심이 있으랴 체념하고 있던 중 뜻밖에도 충격적인 회신을 받게 되었다.

   『먼저 당신의 호의와 친절한 편지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현재 나는 서독 퀼른 국립음악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3주일에 한 번씩 갈 뿐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몇몇 기성 작곡가에게 개인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당신에게는 이러한 광범한 교육이 유용하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현대 음악에 대해서, 작곡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마 이것은 현대 작곡가에게 공통된 문제이겠지요. 그러나 당신처럼 두 문명, 두 문화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고민이 클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그러한 탐구에 있어서 직접적인 조력자가 될 수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우리 유럽의 오랜 음악적 전통의 말단에 있으며 고전음악 속에서 자라났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조성의 원리라든가, 다성음악이라든가, 가장 미묘한 현대화성 연구의 모든 성과를 더욱 더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탐구는 이론적인 토대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 이론적인 면은 남에게 가르칠 수도 있겠지요 - 오직 나 자신의 음악적 감수성으로써 해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대부분 암중모색하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나의 감수성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 음, 그 화성을 찾을 때까지 피아노에 붙어 있을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경우에는 이러한 나의 연구와는 전혀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민족적인 모든 것을 이제부터 찾아내야 하고 만들어내야 할 처녀지를 앞에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 서양의 전통적인 음악을 더 배우고 연구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마음 놓고 출발해야 하며 당신 자신의 음악, 당신 나라의 음악을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중략)
   우리 서양음악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리십시요.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당신들의 본질에 맞는 것을 솔직하게 탐구하도록 하십시요. 우리가 창작을 할 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잊어 버려야 합니다.(중략) 더 배우려고 하지 말고 언제나 찾으십시요. 만들어 내십시요』
                                                                                                    <1956년 10월 3일 화란에서 F. M>

   
   
   나는 프랑크 마르탱에게서 또 하나의 계시를 받았다. 물론 이 말이 홍난파 선생과 결국 같은 내용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크 마르탱이야말로 나의 허를 찔러주었고 민족음악 창조에 대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이 해(1956년 말경)부터 나는 소신껏 나의 음악, 내 나라의 음악, 내 민족의 음악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으니 <부활절 칸타타>(1957년 작), <피아노 협주곡 제 1 번>(1963년 작)을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교향곡 13편, 협주곡 6편 이밖에도 오페라, 실내악곡, 예술가곡 등을 작곡하게 된 것이 모두 그의 교훈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나는 음악학교 재학 시절에 훌륭한 스승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대체로 그들은 나에게 작곡에 관한 테크닉을 가르쳐 준 것 뿐이었다. 하기야 일찍이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가 말한 대로 「예술은 테크닉이 끝난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지만 이 테크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 지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로서의 기본 자세를 가르쳐 주는 말」, 「작가에게 방향을 제시, 지시해 주는 말」 처럼 귀중한 것이 또 있으랴 ….

   이 밖에도 나는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장 크리스토프도 좋고, 「생활의 발견」,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녹 아덴」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악성 전기를 읽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위대한 작곡가들의 창작 방법론 같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지만 그 보다도 나의 관심사는 작가 정신, 작가 태도였다. 따라서 나는 작가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배웠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작품을 통해서만 현실참여를 했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작품을 남긴 것이었다.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준 정신적 지도자 - 프라크 마르탱의 말씀을 오늘도 되새겨 본다.


<월간 은행계 1975.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