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DANK SEI DIR HERR

나  운  영

   '하나님께서 나를 한 번만 살려 주신다면 이 민족과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몸 바치겠나이다.'
   서울에서 폭격을 받으면서 이같은 절박한 기도의 생활을 하던 중 해군본부 군악대의 문관으로 채용되어 1·4후퇴 때에 피아노와 책을 싣고 부산으로 피난을 간 뒤로 나는 작곡은 물론이고 작곡 발표회 개최, 합창단 지휘, 한국현대음악학회 창립, 현대음악감상회 개최, 작곡학 강좌 개최, 가곡집 『아흔 아홉 양』 출판, 월례 성가독창곡 발표회의 개최,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편찬 등등 수 많은 일을 열심히 해낼 수 있었던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의 작곡 활동에 관한 것만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서울중앙방송국의 위촉인 국민가요 「싸우자 세우자」,「상이병사의 노래」와 공보처 위촉인 「통일 행진곡」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을 작곡하였는데 이 중에서 「통일행진곡」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불리어졌다.
   둘째로 문교부 편수국의 위촉인 동요곡 「금강산」, 「어린이 노래」(하늘 향해 두팔 벌린 나무들 같이 …), 「유관순」, 「흥부 놀부」, 「쾌지나 칭칭」등 10수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중에서 「흥부 놀부」와 「쾌지나 칭칭」은 민속조 동요의 첫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셋째는 해군 군종감 정달빈 목사님의 위촉으로 성가 독창곡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편), 「피난처 있으니」(시 46편) 등 5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중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단간방에 피난 보따리를 풀어 놓고 네 식구가 고생하며 살 때에 홀연히 영감이 떠올라 불과 3분간에 반주곡까지 완성시켰으며 이 곡이 해군본부 교회에서 초연되었을 때 연주자와 교인이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것을 잊을 수 없다. 한국적인 성가를 작곡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도 이 때이다.
   넷째로 정인방 무용단의 위촉으로 발레곡 「처용무」를 작곡, 공연하였는데 이것은 오영진 극본의 4막 2장의 대작인데다가 그 때만 해도 표제음악적 작곡기법이 서툴렀고 또한 한국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조화시키기에 매우 고심했었다.
   다섯째로 「교향곡 제1번」을 구상 중에 있었는데 물론 이 곡이 완성된 것은 58년이나 제 2악장 '수난'과 제 3악장 '통곡'은 6.25사변을 주제로 한 것이고 특히 제 1악장  '여명'의 제 1주제는 1.4 후퇴 직전 공습하의 서울 청파동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가족과 함께 공포에 떨 때에 테마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제 4악장 '환희'는 조국 재건과 정부 수립 10주년을 기념하는 송가인데 어쨌든 이 작품이 6·25 사변 중에 잉태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

   이제 나의 작곡 활동을 회고해 보면서 나의 창작기를 스스로 3기로 나눠 보고 싶다.
   즉 제1기는 <42년~54년>으로서 음악학교 졸업 작품인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을 때부터 가곡 「달밤」,「강 건너간 노래」,「접동새」등과 성가 독창곡집 『다윗의 노래』를 작곡했던 때까지이며 말하자면 한국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던 시절이다.
   제2기는 <55년~79년>으로서 「12음 기법에 의한 피아노 3중주곡」,「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를 작곡했을 때부터 13편의 교향곡과 6편의 협주곡과 2편의 교성곡 등등을 작곡했던 때까지이며 한국적인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스타일로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시절이다.
   제3기는 80년 이후가 될 것이니 내 손의 피가 마를 때까지 - 구태여 한국적인 것이나 현대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 자유로이 실내악곡과 성곡을 작곡하는 한편 「화성학」,「악식론」,「작곡법」,「대위법」
등 음악이론총서와 「한국의 양악 150년사」의 저술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려 한다.
   6·25는 나를 거듭나게 했다 . 이 구사일생의 기쁨과 감격을 되새기면서 오늘도 새로운 작품을 구상해 본다.

 <1979.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