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접동새

나  운  영

   나의 가곡집 『아흔 아홉 양』은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12월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가는 길」(김소월), 「달밤」(김태오), 「아흔 아홉 양」(찬송가 가사), 「박쥐」(유치환), 「별과 새에게」(윤곤강), 「접동새」(김소월), 「강 건너간 노래」(이육사)가 들어 있다. 나는 이 책의 끝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8·15 이후 오늘날까지 걸어 온 나 자신의 발자취를 회고하며 아울러 낭만에서의 탈피를 기약하는 이 초라한 가곡집이 조금이라도 민족음악 수립에 도움이 될까 하여 부끄럼을 무릅쓰고 감히 내놓는 바입니다. 별로 많지 않은 가곡이나마 그 가운데서 소위 서양 창가조를 벗어난 낭만적 또는 민족적 가곡이라고 생각되는 7편만을 추려 보았습니다.』

   이 7편 중에서 내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곡은 두 말할 것 없이 「접동새」이다.

   이 곡은 1950년 1월 10일에 완성되었다. 그러니까 6.25 직전에 작곡된 것인데 그야말로 나의 작곡 신조인 '선토착화 후현대화'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줄로 생각된다.
   물론 이 전에도 「가는 길」(1947년 작)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첫 시도에 불과했고 내 나름대로 좀 본격적인 작품이라면 「접동새」를 손 꼽게 되는데 그 까닭은 이 곡이 우리나라 가곡 사상 최초(?)의 판소리 풍의 곡이기 때문이다.
   거문고와 대금, 피리를 연상케 하는 전주에 이어 「접동 접동 아 울오라비 접동」의 주제가 나온 다음에 가야금과 장구를 연상케 하는 간주에 이어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는…」이 이어진다. 특히 「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죽어서도 못잊어 차마 못잊어…」등은 그야말로 판소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인데 이것은 판소리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판소리의 '멋'과 '맛'을 풍겨 보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장단, 가락은 물론이고 특히 화성 처리에 있어서 많은 고심을 한 그 흔적이 뚜렷하게 보이는 이 곡은 다시 거문고와 대금, 피리를 연상케 하는 후주로 조용히 끝난다.
   이 곡은 역시 부산 피난 시절인 1952년 12월에 열린 나의 「제1회 작품연주회」 때 김천애 선생에 의해 초연되었고 정부 환도 후 김천애 독창회 때 다시 불리어졌고 이어 이동범 선생의 레코드를 통해서 비교적 널리 알려졌는데 위의 두 분 이외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별로 들어 보지 못하고 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의 가곡 중에서는 「가려나」와 「달밤」이 가장 많이 애창되는 셈인데 이런 것들은 서양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즐겨 불리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에 비하면 「가는 길」이나 「접동새」는 우리 민요나 판소리의 '멋'과 '맛'을 모르면 부를 수 없는 곡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민요 창법, 시조 창법, 판소리 창법을 모르면 민족적인 가곡을 제대로 부를 수 없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나의 가곡은 「달밤」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와 「접동새」로 집약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953년작)가 20년 뒤에서야 즐겨 불리어진 것처럼 「접동새」는 앞으로 20년 뒤 - 그러니까 이 곡이 작곡된 지 반세기 뒤에서부터나 많이 불리어지게 될 것이 예상된다고 말한다면 곧이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가 뭐라 한들 「접동새」는 나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곡이다.

<월간 「기러기」 83.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