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4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책난봉

나  운  영

   '3치'(三痴)란 말이 있다. 첫째로 남의 책을 빌리는 사람, 둘째로 남에게 책을 빌려주는 사람, 셋째로 남에게 빌렸던 책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못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책이란 값이 싸든 비싸든 자기가 사서 읽어야 된다는 말이다. 즉 내 책이어야만 마음 놓고 언제든지 읽을 수 있고 또한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책 난봉(?)은 중학 시절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요즈음과는 달라서 옛날에는 용돈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단지 전차 회수권 사라고 주는 일금 1원 50전으로 매달 몽땅 책을 사고 줄곧 걸어 다녀서 나는 5년 개근을 했다.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국내와 국외를 불문하고 헌 책방을 뒤지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학생 시절에는 책방에서 희귀한 책을 발견하긴 했으나 공교롭게도 돈이 없을 경우 그 책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숨겨 놓고  돈이 마련될 때까지 매일 가서 그 책의 안부(?)를 확인하고 돌아오곤 하다가 드디어 돈이 생기면 단숨에 달려가서 사온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 때의 그 책들이 지금도 나의 서재에 건재하다.
   6·25 사변 후로는 옛날과 달라 고서도 잘 나돌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은 주로 원서를 열심히 수집하는 중에 있는데 원서와 번역서(일.한)를 모조리 구입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특히 초판뿐만 아니라 2판, 3판, 4판까지도 빠짐없이 구해야 하니 꽤 부지런해야 한다.
   철 모를 때에는 일단 사서 읽은 책 중 별로 신통치 않은 것은 팔아 버리고 그 돈으로 다른 책을 사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책이 갑자기 필요해져서 다시 샀던 경험이 있은 후로는 절대로 팔아 버리지 않기로 했다. 악서(惡書)도 그 나름 대로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에는 아무리 희귀한 책이라 할지라도 내가 이미 구한 책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었는데 지금은 모조리(?) 사 모으고 있다. 왜냐하면 책이 분실될 경우에 대비해서, 혹은 좀더 상태가 좋은 책으로 바꿔 갖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의 책과 -유리한 조건하에 - 교환하기 위해서이다.

   연구 발표나 자료 수집차 나는 외국 여행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 때마다 제일 값싼 음식으로 겨우 한끼만을 때우고 매일매일 책방을 헤매 다니다가 꿈에도 그리던 책을 한아름 안고 희열에 넘친 표정으로 -그러나 발바닥이 부르터 가까스로 숙소까지 돌아온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30년 이상이나 찾던 책을 사가지고 마치 개선장군이나 된 듯 자랑스런 기분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길을 잃어 죽을 고생을 했던 일이라든가, 한 책방에서만 무려 6시간 이상이나 책을 고르고 고르던 일도 있었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대로 -열심으로 구하는 책은 언젠가는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는 진리(?)를 나는 자주 경험하게 된다. 하여튼 좋은 책을 수집하는데 있어서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연주회를 앞두고 바이올린을 3일간만 빌려 달라고 애원하는 백해제 후배에게 채동선 대 선배 가로되 '마누라와 바이올린은 빌려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을 목격했던 일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아예 그런 소릴랑 다시는 하지도 말라'는 무서운 교훈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나도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라 할지라도 -절대로 책을 빌려주지 않는다. 실비를 받고 복사해 줄 용의는 항상 있지만---. 이것이 모두 어떻게 해서 모은 책들인데….
   그래도 요즈음은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나 교보문고를 비롯해서 손쉽게 전문서적을 살 수 있는 매머드 책방들이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월간 「책방 소식」 84. 5,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