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우리 나라 피아노 교육의 발자취

나  운  영

1. 초기의 음악교육
  1884년 개신교의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N.Allen,1858~1922)과 함께 찬송가를 통해서 서양 음악(洋樂)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니 한국 교회(개신교) 100년은 곧 양악100년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선교사들과 함께 들어온 악기는 코오넷(Cornet)과 오르간(Reed Organ)이었고 우리 나라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이 두 악기를 배운 사람은 김인식 (金仁漫,1885-1962)이었다.
  김인식은 선교사로부터 특히 오르간을 열심히 배웠는데 그 실력이 얼마나 좋았던지 평양숭실중학(崇實中學) 3학년 때에 아랫반의 음악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1911년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業傳留所)>에서 서양악 교사가 되어 이상준(李尙俊,1884-1948), 홍난파(洪蘭坡,1898-1941) 등을 가르치게 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에는 조선악과와 서양악과가 있었는데 전공과는 다음과 같았다.

     조선악과‥‥‥가곡, 현금, 가야금, 양금, 단소, 생황, 피리, 대금
     서양악과‥‥‥성악, 악리, 창가곡조, 풍금, 사현금

     주] 창가곡조는 창가 교육을 의미하고 풍금은 리이드 오르간으로서 피아노가 우리 나라에 수입되기 이전의 유일한 건반악기이며, 사현금은 바이올린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악과 교사로는 김인식과 보조 교사로 하대홍(河大泓 제 1회 졸업: 성악 전공,제 2회 졸업: 사현금 전공)과  염광섭(廉光燮 제 2회 졸업: 풍금 전공)이 있었고, 졸업생 중에는 이상준(제 2회 졸업: 조선악과 가곡 전공)과 홍난파(제 2회 졸업: 서양악과 성악 전공,제 3회 졸업: 사현금 전공)가 들어 있다.
2) 에피소우드로 엮어 보는 초기의 피아노 음악
   김영환(金永煥 1893-1978)도 5,6세 때부터 선교사의 집 풍금에 매혹 되었었는데 열살이 채 안 되던 때에 음악에 이해가 많은 부친으로부터 풍금을 선사받아 숭실중학 시절에 선교사 부인에게서 레슨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일본에 유학하여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를 졸업한 후 다시 우에노(上野)에 있는 동경음악학교(東京音樂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피아니스트로서 연전 (延專).중앙고보 (中央高普). 숙명고녀 (淑明高女) 등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김원복(金元福), 이애내 (李愛內)등 우수한 제자들을 길러 내게 되었다.

   이제 초창기에 있어서의 피아노에 얽힌 에피소우드와 그의 제자에 관한 에피소우드를 중앙일보에 35회에 결쳐 연재했던 『양악백년(洋業百年)』 중 <제16호와 제24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 당시 경성(京城)을 다녀간 외국의 명연주가 속에 피아니스트는 별로 없었다. 피아노 독주라는 것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한 가지 피아니스트를 초청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하는 사람이 자기의 악기를 들고 다니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당시는 피아니스트들도 유명한 사람이면 자기가 연주할 그랜드 피아노를 갖고 다녔던 것이다. 기차 타고 배 타고 해야 하는 그 당시에 연주회마다 피아노를 갖고 다닌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더구나 주최하는 초청자로서는 그 무거운 짐 값만 물어도 상당했고 그 관리가 귀찮기 짝이 없었다.
       피아니스트는 원래 자기 손에 익숙한 피아노라야 마음대로 제 소리를 내는 법인데 그 당시 아시아 지역에는 좋은 피아노가 있을리 없어 모두들 자기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
       더구나 경성(京城)에는 이들이 연주할 만한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가 있을 턱이 없어 실제로 1925년에 온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앙리 질 마르셰도 자기 피아노를 가져와 조선호텔 강당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무거운 짐을 풀었다가 새로 조율을 해서 연주회가 끝나면 다시 짐을 꾸려 부쳐야 했는데 연주회보다 그 뒤치다꺼리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 피아노라는 것을 제일 먼저 가졌던 사람은 아마도 마르텔(Martel)이라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 나라에 군악대를 만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 의 사위로 나중에 경신학교(儆新學校)의 교장을 지냈는데 그의 부인인 아말리(Amalie)는 피아노도 잘치고 개인 교수도 했었다. 이 때가 1900년대의 초 쯤이다.  그 후 평양(平壤)의 선교사 중에도 한 분이 갖고 있어서 내가 숭실중학(崇實中學) 다닐 때 배울 수 있었고 이화학당(梨花學堂)에도 일찍부터 피아노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으로 개인이 피아노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요즘처럼 피아노가 재산목록에 들 정도도 아니었으며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는 돈을 주고도 피아노를 살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피아노를 산 것이 일본서 음악 공부를 할 때였으니까 아마도 우리 나라 사람으로 처음 피아노를 소유하게 된 것일 것이다.
        1918년 내가 우에노(上野에 있는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도 우리 나라에는 피아노라는 것은 물론 풍금(Reed Organ)도 별로 없었다. 교회에도 풍금이 고작이었고 내가 교수로 부임한 연전(延專 현 延世大學拳校)에도 피아노는 없고 조그만 풍금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당시 연전 (延專)은 예수교 네 교파가 연합한 학교로 겉보기는 돈이 많아 보였지만 실제로 피아노 한 대 살 예산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음악 관계 도서들도 많이 기증했는데 2.3년 후에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사서 기증했다.
       일본에서 그 때 돈 8천원을 주고 사서 부쳐 온 것으로 스타인웨이에 다음 가는 피아노의 명기(베히시타인)였다. 이 피아노는 건반이 부드러워 여류 피아니스트들이 좋아한다는 것이었는데 6.25때 없어져 버렸다.
       스타인웨이라는 명기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보다도 뒤의 일이다. 당시 경성제대 (京城帝大 현 서울대학교)의 영어 선생으로 있던 영국인 블라이스(B.H.Blyth,1898~1964)의 부인이 피아노를 해서 스타인웨이 그랜드를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 후에 내가 가졌던 것은 중간 것쯤 되는 스타인웨이 그랜드로 냉동(冷洞, 현 冷泉洞) 다음에 살던 충정로(忠正路) 집에 두었었다. 일본에서 1만원을 주고 산 것인데 학생들은 얼씬도 못하게 애지중지 했었다.
       그 때 집에는 그랜드 피아노 외에 어프라이트 피아노를 2대 갖고 있었다. 피아노 3대를 조그만 한옥에 집어 넣고 나니까 어떻게 많이 자리를 잡아먹는지 잠잘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였다.
       블라이스 부인이 가졌던 스타인웨이 그랜드는 나중에 배재학교(培材學校)가 인수해서 강당에 두었었다. 당시 블라이스 부부는 애기가 없었는데 남편이 일본 여자와 연애를 하는 바람에 가정 파탄이 생겨 부인은 피아노를 팔고 한국을 떠났다. 이후에 숙명여학교(淑明女學校) 제자인 이 애내(李愛內 1909- )가 독일 가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돌아오면서 스타인웨이 그랜드를 가지고 왔었다.
       당시의 피아노 값은 일제 야마하(山葉)가 2백50원짜리부터 있었고 베히시타인이 1천원부터, 그리고 스타인웨이는 제일 싼 것이 1천5백원이고 비싼 것은 4만-5만원씩 했다.이렇게 비싼 것은 동경(東京)에서도 구하기가 힘들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함부르크와 뉴욕 두 곳에서 나오는 제품이 있었는데 같은 계통 회사지만 아무래도 함부르크제가 전통적인 소리가 난다는 평이었다. 스타인웨이는 그랜드 피아노에만 크기와 용도에 따라 일곱 가지 종류가 있다. 베이비 그랜드라는 모델 S로부터 새미 그랜드라는 모델 M, 그리고 0,A,B,C,D까지이다. 모델A 이상부터는 살롱 그랜드라고 해서 페달이 3개씩 달려 있는데 그 당시의 피아노는 모두가 모델A 이하였다.  오케스트라 콘서어트 그랜드라고 불리는 제일 큰 모델 D는 우리 나라에서 최근까지 이대 (梨大) 강당과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 있었는데 시민회관 것은 불타 없어져 버렸고 그 후 서울대, 단국대(壇國大), 국립극장, 이화여고(梨花女高) 등에서 들여와 요즘은 많이 늘어났다」

     「테너 현제명(玄濟明)이 귀국할 무렵 나는 왕실에서 세웠다는 숙명고녀(淑明高女)로 옮겨 교편을 잡았다. 연전(廷專)에는 그랜드 피아노까지 기증을 하고 음악과(音樂科)가 생기기를 기다렸지만 도무지 기미도 보이질 않아 화가 나서 뛰쳐 나온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연전(延專)에 나가면서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중앙고보는 당시 운영난에 허덕이던 기호학교(畿湖學校)를 김성수(金性洙)씨가 인수한 것인데 선생의 3분의 2가 무자격자라고 해서 날 보고 자꾸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우에노(上野)에 다닐 때 최남선(崔南善) 작사의 중앙고보 교가를 작곡해 준 인연도 있고 또 인촌(仁村)의 권유도 있어 무보수로 한 학기만 나간다고 했던 것이 그만 근 7년간 강단에 서고 말았다. 이 때 중앙고보에서는 이병도씨가 역사를, 변영태(卞榮泰)씨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는 대학 교수와 중학 교사를 많이 구별했던 모양으로 나는 연전(延奪)의 정교수로 있다가 같은 월급인 2백원으로 숙명고녀에 왔는데 일본인 교장 월급보다 40원이나 많았었다. 당시의 교장 월급 1백60원은 대학에 가면 조교수급 밖에 되질 않았다.  월급이 많으니까 일도 많이 해야 했는데 담임은 하지 않았지만 훈육 주임,체육 부장,문화부장 그리고 기숙사 위원까지 맡았었다. 이 때의 기숙사 사감은 해방 후 숙대 총장(淑大總長)을 지낸 임숙재 (任淑宰)씨였다.
       숙명에 있는 동안 제자로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이숙종(李淑鐘), 박화성(朴花城), 최정희(崔貞熙) 등과 음악을 전공한 이애내(李愛內), 유무경(劉武卿. 洪鐘仁 부인), 이정자(李貞子,李仁範 부인) 그리고 무용을 한 최승희(崔承喜) 등이 있다.  숙명에서도 나는 피아노 세 대를 사서 기증했다. 피아노를 배우려는 학생은 많고 피아노는 한 대 뿐이라 더 샀던 것인데 이 때 학교에서는 피아노에다 누구 기증이라고 쓰려는 것을 절대 못쓰게 했었다. 주면 그냥 줬지 누가 줬다고 밝히면 치사해 진다는 생각이었다. 」


(-이상 김영환의 에피소드)
3) 국내 피아니스트들의 계보
  그의 수많은 제자 중에서 우리는 양대 산맥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제 그 계보(系譜)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원복 - 백낙호, 이성균, 김정규, 이명학, 김하경, 고중원, 김명진, 이옥희,                              조삼진, 정은모, 이귀영, 변화경, 김인숙, 김덕주, 조성미, 윤병우,                              박지혜, 이강숙, 박미려 등등(이상 무순)
김영환 
               
               이애내 - 신재덕, 정정식, 김성복, 이영옥, 박성혜, 이영희, 백창규, 정진우,                             구연소, 박미애, 박정윤, 강운경, 이기원, 권기택, 임옥빈, 이길자                             등등(이상 무순)
           주]1. 김원복, 이애내의 제 2대 제자 중에는 신수정. 장혜원. 한동일, 정순빈, 이혜화, 이대욱, 이방숙, 박지혜. 김 석, 손국임. 전경주, 윤미재, 김선자. 이경숙, 신봉애, 서계령, 이화인, 유은애. 김은진, 김진명, 장애자, 이태은, 임헌원, 김덕희, 임자향, 최영자. 김귀현, 한옥수, 이영인, 김형규, 박미령 등등(이상 무순) 기라성 같은 제자가 속출했다.
               2. 김영환의 계열에 속하지 않는 사람 중에는 Miss Young, Miss Wood(Mrs.Gericke), Malsbary,박경호(1899~1979)를 비롯하여 김영의. 김메리, 박현숙, 이경희, 이흥렬, 장보원, 조두남, 한인하, 김기우, 이호섭, 윤기선, 조신옥, 김순렬 등등(이상 무순)의외 제 1대 제자 중에 윤보희, 곽은수. 윤 연, 서계숙, 박지수, 김혜자, 성두영, 성정희, 김금봉, 이 연화, 김춘명. 오건식, 서삼미. 서광호, 김명선, 이정순, 이길자, 심인섭,주혜정, 임금자, 정은순, 최승현, 이상희. 송정이, 채준자, 이청행, 추승옥, 유은숙,박숙희,김화자, 김진숙, 장정순, 김민아, 최 순, 홍영주, 서주희, 제갈 삼, 황 선,전영혜, 한정강, 이계순 등등(이상 무순)이 있다.
              3. 이상 원로급의 피아니스트 20명을 대상으로 발송한 앙케이트의 회신을 근거로 조사한 것이나 개   중에는 회신을 보내 오지 않은 분도 있어 미비한 점이나 누락된 점. 착오 등이 많을 것이므로 다음 기회에 수정 보충하려 한다.
              4. 이 밖에 국내에서의 스승을 밝히려 들지 않는 자 또는 외국에서만 레슨을 받은 자 등등은 이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김영환(金永煥)은 서양 음악의 도입기에 있어서의 3대 공로자인 김 인식(金仁湜), 이 상준(李尙俊), 김형준(金亨俊) 이후의 최초의 음악 전공자요, 최초의 피아니스트로서 1918년에 귀국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니 어언 66년이 흘렀다. 그 동안 우리나라 피아노계는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이제는 한동일(韓東一), 백건우(白建宇), 정명훈, 서주희(徐周希) 등등 국제 무대에서 각광을 받는 우수한 피아니스트들이 우후 죽순처럼 날로 늘어감을 생각할 때 김영환(金永煥)을 새삼 기억하게 된다.


<최신피아노강좌1 (세광음악출판사, 1984. 11.10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