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악단을 해부함
- 1952년 발표, 원제: 허세의 악단 -

나  운  영

   동요나 가곡 두어편만 써도 작곡가 행세를 할 수 있는 우리 악단!
   음정, 박자는 맞았건 틀렸건 제멋대로 기분만 내면 환영 받는 우리 연주계!
   도대체 평론이 없는 이 땅!

   이것이 현금 우리 악단의 실정이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딜레마에 빠진 우리 작곡계, 연주계를 위하여 나의 항상 느꼈던 바를 몇 가지 적는 것도 정녕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리라.
   먼저 작곡계를 바라보건대 여기에는 몇 가지 파(派)가 있다.
   첫째로 작곡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소위 <T.S.D파>이다. 이 파는 아직 학습도상에 있는 자들과 고전파 음악 이외의 것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일종의 고고학자(?)들의 집단이다. 나는 특히 이것을 T.S.D파로 부르고 싶다. 즉 Ⅰ,Ⅳ,Ⅴ의 세 가지 화음만을 주로 사용하여 작곡하는 파를 가리켜 내가 지은 가칭이다. 정3화음, 부3화음, 7화음, 변화화음 등 화음은 많은데 하필 그 중에서도 이 세 화음만을 애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기야 동요, 찬송가, 가곡 등은 될 수 있는 대로 상직적인 화음을 쓰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정도문제가 아닌가? 「무지한 자들이여! 완고한 자들이여! 묻노니 그대들은 어느 때까지 18세기의 탈을 쓰고 안주할 생각인가?」
   둘째로 많은 것은 <민족파>이니 이 파는 민족적 색채를 나타내보고자 노력하는 자들의 집단이다.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나 이것이 한. 양(韓.洋)의 형식적 절애 (折哀)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창극조나 민요조의 선율에 3화음이나 왈츠 리듬을 붙이는 것은 마치 양복 입고 갓 쓴 격이다. 이런 자들은 모름지기 소위 근대화성 중에서 5도 화성 (또는 4도 화성), 부가화음 등을 연구하여 우리 선율에 잘 부합되는 독특한 화성을 발견해야할 것이 선결문제이며 우리의 장고장단을 연구함으로서 선율, 화성, 리듬이 완전히 조화되는 수법을 써야할 것이다.
   셋째로 <낭만파>가 있기는 하나 수적으로 매우 적다. 현대파는 고사하고 낭만파로 지목할 만한 사람은 손꼽을 정도임을 볼 때 우리 작곡계가 얼마나 낙오되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하기야 양악이 전도사로부터 이 땅에 들어왔고 또 오늘날의 작곡가의 대부분이 교회 안에서 자라난 관계로 부지부식간에 찬송가식 고전파음악이 골수에 뿌리 깊이 박혀있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 고민하는 자들도 많을 것이나 무엇보다도 이에 대한 연구열이 부족한데 원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다만 여기에서 나는 자아도취에 빠지지 말기를 이 파에 속하는 자들에게 말해 둔다.
   넷째로 <현대파>가 있어야할 것이나 이것은 몇몇 작곡학도들 이외에는 관심조차 가진 사람이 적음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파에 속하는 자들은 선배 또는 교사들로부터 통렬한 비난을 받고 있으며 이단으로 불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주기술의 곤란으로 말미암아 발표의 기회를 가질 수 없으므로 실제적으로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완강한 교사들이여! 시대에 뒤떨어진 선배들이여! 현대음악을 무시 말라. 세계적인 사조를 막을 자 누구뇨?」 또한 이 파에 속하는 자들에게 일러주노니 「고의로 현대음악을 쓸려고 하지 말라. 언제나 작가는 자기에 충실해야 한다. 모더니스트로 가장한 것보다 한가지라도 현대음악에 대하여 연구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닌가?」

  우리 선배 가운데에는 확연히 조성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조기호(調記號)를 붙이지 않고 임시기호를 붙여 무조음악을 가장했던 분이나 또는 이동계명으로 음정을 더듬어가며 고의로 무조적 선율을 쓰기에 고생하던 사람들도 있음을 볼 때 이와같이 자기를 기만한 작품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하루바삐 고전, 낭만의 전통을 소화시키고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음악을 쓸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되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무조음악, 미분음음악, 6음음계, 12음음계, 합성음, 절대대위법 등등 가지가지의 특색을 가진 현대음악을 작품을 통하여 체험해보자. 현금 미국이나 구라파는 물론이고 일본에서까지 쉔베르그의 작풍이 유행되고 있는 이때에 우리나라만 T.S.D파 음악에서 꿈을 꾸고 있을 것인가?
 「작곡가들이여! 분발하자! 민족성에 입각한 세계음악으로서의 우리 음악을 수립하기에 매진하자!」

   작곡계가 이와같이 침체상태에 빠져 있는 이때에 연주계는 과연 어떠한가?
   연주는 완벽에 가까운 기교와 적절한 표현에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즉 기교와 표현이 모두 중요하나 그 중에서도 기교가 선결문제이다. 세계적 제금(提琴)교수인 레오폴드 아우어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기교가 끝난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현금 우리 연주계에 일대 경종을 울리는 무서운 교훈이다. 즉 기교가 끝나기 전에는 표현을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음정, 음색은 그만 두고라도 박자, 리듬조차 틀리는 것이 상례(?)인 우리 연주가들이여!
 「소질을 논하지 말라. 그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느니라.」
   다음으로 기교에 따르는 문제는 해석, 표현이니 이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할 일은 「연주법(표현법)에는 기준이 있다는 것과 그 기준은 악곡을 이론적으로 해부하면 저절로 발견할 수 있다」는 두가지이다. 즉 악곡의 선율에 있어서 비화성음의 종류(경과음,보조음,계류음,전과음,선행음,보속음 등)를 분명히 구별함에 따라 연주법이 발견되고 화음의 종류와 형식의 구별에 따라 강약, 속도, 표정 등 여러 가지 해석법을 알 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밖에도 작곡자의 전기라던가 그 작품이 제작되었을 때의 시대적 배경 등도 고려하여야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주법을 좌우하는 것은 화성과 형식의 이해에 있다.
   흔히 우리나라 연주가 - 특히 합창지휘자들 가운데는 악곡을 이론적으로 해부해 보지 않고 오로지 근거 없는 기분 또는 감정만으로 표현하는 자들이 많음은 한심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연주법에 기준이 없다면 정신질환자일수록 더 독특한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이 이론을 무시하는 연주가를 나는 <감정과다증 환자>라고 불러둔다.

   이상 말한 여러 가지 점을 검토해볼 때 현금 우리 연주계에 있어서 연주법(해석, 표현법)의 이론을 시급히 확립시킬 것이 당면과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끝으로 우리 악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전문적인- 권위 있는 평론가가 나오기를 고대한다.
  ‘디렛탄트’가 평론할 시기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다. 평론가의 책임은 실로 중대하다.

1952.10.25 주간 문학예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