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한국 양악 100년사 (4)

나  운  영

   숭전대학교 동문회 회원명부를 보면 숭실대학 제 5회 (1913년) 졸업생 8명 중에 김인환(金仁煥)과 박윤근(朴潤根)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나라 양악의 공로자의 한분인 마우리 선교사의 애제자이였다.

마우리(Eli M . Mowry, 牟義理)
   마우리는 1909년에 평양에 온 선교사로서 35년간 숭실대학과 숭실중학에서 생물과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장대현교회에서 남성찬양대, 소녀합창단,청년면려회, 브라스 밴드와 오케스트라도 조직하여 지도했다.
   한편 숭실대학 전도단을 조직하여 교회음악과 양악을 보급시켰고, 특히 3 · 1운동 때에는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인식, 김인환, 박윤근, 김영환, 박경호, 박태준, 현제명, 김세형, 안익태 등등-초창기의 유명 음악가가 숭실에서 배출된 것이 모두 마우리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의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김인환(金仁煥, 1891~1947)
   김인환은 1891년 4월 21일생 (평양)의 명나팔수로서 1914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숭실중학 교사 겸 숭실관악대 지휘자는 물론이고 장대현, 산정현, 서문밖, 창동교회 찬양대를 지휘했다. 1931년 서울로 올라 와 이왕직(李王職) 악대의 고문으로 관악운동에헌신하다가 1947년 10월29일 별세했다
   <주> 표준음악사전(금수현엮음)에는1934년 별세로 되어 있으나 장남인 김경석(金經石)의 증언에 따라 1947년으로 바로 잡는다. 김인환은 김인식의 실제(實弟)이기도 하나 형은 서울을 중심으로 최초의 음악교사요, 작곡가로서 특히 교회음악 발전에 공헌한데 비하여 아우 김인식은 평양을 중심으로-특히 관악분야를 개척했으니 한국 양악 1백년사에 길이 빛날 큰 별임에 틀림이 없다.
   숭실대학 제15회 (1923년) 졸업생으로서 현제명(玄濟明, 1902~1960), 박경호(朴慶浩,1899~1979)와 동기생이요, 김인환이 지휘하던 숭실관악대의 피콜로 주자였던 배흥권(裵興權1902~)의 증언에 의하면, 김인환이 임종시에 방의 벽지를 뜯고 그 속에 숨겨 둔 「대한제국 애국가」의 악보를 유품으로 주었다고 한다.

박윤근(朴潤根, 1891~1989.12.1)
   박윤근은 1891년 8월 5일생 (평양)으로서 우리나라 음악가로서 최고령자일 뿐만 아니라 구미 (歐姜)를 통털어 최초로 외국유학을 한 음악가이니 실로 역사적 인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김인환과 함께 숭실대학 제5회 졸업생인 그는 마우리 선교사의 애제자로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에 능란했다.
   1916년부터 19년까지 3년간 미국 우스터 대학(Wooster college)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한편 부전공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파이프 오르간, 합창지휘를 연구하고 1921년 귀국 후로는 숭실대학에서 화학은 가르치기 않고 음악교수로서 숭실대학합창단과 숭실대학 관현악단을 지휘했다.
   한편, 장대현교회 찬양대(혼성 합창)를 통해 교회음악 발전에도 헌신하였는데 숭실대학에서 박경호, 차재일(車在鎰), 박태준(朴泰俊), 현제명, 박원정(朴元貞), 김세형(金世炯), 독고선 (獨孤璇), 최성두(崔聖斗) 등 많은 음악가를 배출했다.
   이와같이 그는 말스베리 (DwightR. Malsbary, 馬斗元, 1899~1977)의 전임자(前任者)로서 평양 음악계에 많은 공적을 남기고 1945년말에 서울로 올라온 후로 오늘날까지 천수(天壽)를 누리고 계시다.
   그는 매우 겸손하여 절대로 음악가로 자처하지 않으나 미국유학에서 귀국 후 줄곧 음악활동에만 전념하여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교육을 받은-음악가로서의 예우를 받아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주> 박윤근에 관한 증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윤근> 많은 인사들이 내가 미주에 가서 음악을 전공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읍니다만 음악은 말하자면 곁창구로 유입(流入)한 것을 좀 얻어 가지고 귀국하여 양악 초창기에 음악을 애호하는학생들의 길을 안내해 주었을 뿐이다. 나는 미국에 가기 전에 마우리선교사의 부인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김인식 선생에게 음악과 도화를 배웠으며,미국에 가서 매시간당 1불씩 내고 파이프 오르간을 배우기도 했다. 제자로는 박경호, 현제명, 박원정,김세형, 박태준, 권태호, 차재일, 계정식, 정훈모 등이 있다.
   <박경호> 선생님은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교육가이시자 음악가의 원로로써 1921년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는 미국 출신이라면 대단히 귀하게 여겼는데 특히 피아노를 잘하셨고, 영어에 능란하며 평양 일대의 일류 인기자였다. 숭실대학이 숭실전문으로 변한 뒤에도 음악교육에 힘써 보려고 하던 차에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가 되자-더욱이 미국 출신으로 어쩔수 없이-집에 들어 앉게 되었다.
   <배홍권> 선생님은 김인환 선생님과 숭실대학 동기생으로서 마우리 선교사의 감화로교회음악 지휘자의 바톤을 물려 받은 인물이며, 박태준은 그의 차석으로 지휘의 대를 이은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당시 장대현교회 남성찬양대의 지휘자는 마우리 선교사요, 반주자는 박윤근 선생이었다.
  <김면주> 나는 숭실전문 재학시 김세형과 동기생이었는데 선생님은 박경호, 계정식(桂貞植) 등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셨다.
   <최성두> 나는 숭실전문 재학시 강신명과 동기생이었는데 선생님은 바이올린과 합창지휘자로 활약하셨으며, 박경호, 박태준, 현재명, 김세형 등을 가르치셨다.
   <강신명> 숭실대학은 창립 초기에 문과와 이과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과출신으로 음악을 하셨다 하겠다. 즉 숭실대학에는 음악과는 없었으나 마우리 선교사의 적극적인 지도하에 많은 음악인을 길러냈는데 선생님은 그중의 한분으로서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미국유학에서 돌아와서는 음악교수로 계시면서 숭대관현악단을 조직, 지휘하시는 한편 장대현교회에서는 합창을 지휘하셨다.
   <문영복> 장대현교회 중심으로 성가대(혼성합창) 가 역사적으로 처음 평양에서 조직되어 차재일, 길진경, 조선부, 정훈모, 김효근 등 독창자를 많이 양성하신 분이 선생님이다.


<1986. 6월호 사보 삼익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