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한국 양악 100년사 (5)

나  운  영

   김인환, 박윤근 보다 1년 선배인 정애식(鄭愛息)을 빼 놓을 수없어 먼저 소개한다.
정애식(鄭愛息,1890-1951?)
   정애식은 본명이 김앨리스(金愛理時 또는 金愛理施, 金愛湜) 로서 이화학당 대학부 제 1회 졸업생 (1914년)이며, 1917년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있는 갓스이(活水)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계속하여 1920년에 미국 오레곤주 포틀랜드에 있는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Ellison -whiteConservatory ) 피아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하여 1923년부터 50년 11월까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봉직했을뿐만 아니라 초대 음악과장(1925~26)과 파이프 오르간이 1918년에 설치된 정동감리교회의 초대 오르가니스트를 역임한 -여성음악가로서는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하다. 그는 피아노는 물론 음악이론, 작곡법, 청음과 시창, 음악사 및 음악감상법 등을 강의했으니 실로 오늘날의 이화여대 음악대학의 기초를 세운 공로자이기도 하다.

   <주>2대(二代) 음악과장과 정동감리교회의 2대 오르가니스트는 M-iss Mary E.Young (美理英, 1880~?)인데 그는 본래의 전공은 가사과였으나 1919년 12월 이화학당 음악교원으로 취임하여 42년에 사임했으니 그의 공로는 정애식에 결코 못지 않다.
김영환(金永煥, 1984~1977)
   김영환은 평양 태생의 대 지주의 아들로서 6세때 미국인 선교사 W.M. Baird(裵緯良)집의 오르간 소리에 매혹되어 음악에 눈뜨기 시작했고, 숭실학교에 다닐 때에는 김인식(金仁湜)과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13세(190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다이세이 (大成)중학, 도요(東洋) 음악학교를 거쳐 우에노(上野)에 있는 도쿄음악학교를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1918년에 졸업했다.
   곧 귀국하여 음악과가 없는 음악과장으로 연희전문학교 조교수에 취임하여 10년간 가르침으로써 박태원(朴泰元), 안신영 (安信永), 신봉조(辛鳳祥), 독고선(獨孤璇), 이인선(李寅善), 이광준(李光俊) 등을 배출했다.
   또 우리나라 피아노계의 2대 산맥인 김원복(金元福,1908~)과 이애내(李愛內, 1909~)를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피아니스트를 탄생케 했을뿐만 아니라 1919년에 홍난파(洪蘭坡), 김형준(金亨俊)과 함께 경성악우회 (京城樂友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 음악학교 출신이니 참으로 역사적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주> 그는 1977년 2월 4일 미국에서 별세했다.  김영환에 관해서는 「남기고싶은 이야기들 - 양악 백년」 (1974년 4월19일 ~ 5월29일, 중앙일보)과「 우리나라 피아노 교육의 발자취」(세광음악출판사 발행·최신 피아노 강좌 1권중 제 9장) 의 일독(一讀)을 권한다.
홍난파 (洪蘭坡, 본명 洪永厚,1898~1941)
   홍난파는 수원(水原) 근처인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1898년 4월10일에 태어나 1941년 8월 30일에 요절했는데 국악에 있어서의 3대 악성이 왕산악(王山岳), 우륵(干勒), 박연 (朴堧)이라면 양악에 있어서 3대 악성 중의 첫째가 홍난파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그는 2세에 선교사의 권유로 백씨인 석후(錫厚)와 함께 상경하여 정동에서 살면서 이화학당에서 흘러 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매혹되어 음악의 길을 택하게 된 셈이다.
   1910년에 서울 YMCA 중학과를 다니는 한편 1912년에는 조선정악권습소에 입학하여 성악과 4현금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1918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음악학교 예과를 수료하고  3· 1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1919년 도쿄에서 순 예술잡지인 「三光」을  3호까지 편집 ·발행했다.
   <주> 「三光」창간호(1919년 2월10일 발행)의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창간의 사    2. 축사/이병도    3. 音樂이란 何오/홍영후    4. 人文發達의 三大時期 /Y. H . 생     5.丁巳 의 作時 /상아탑     6.音樂上의新智誠 /난파     7. 부슬비 오는 밤(詩) /쏠파生    8. 서울에 계신 K兄께/ㄷ. ㄹ. ㅁ .    9.金의 行方 (音樂小說) /都禮美     10.바람과 빛 (短篇哀話) /ㅎ.ㅇ .ㅎ.     11.蝴蝶과 ??/八克園     12.사랑하는 벗에게/도뤠미 生譯     13.理想的 結婚 (俗歌喜劇) /柳志永     14.編輯餘言
   Y, H생은 都禮美, 도뤠미生은 홍난파의 필명임이 분명하다.
   그는 1922년 「硏樂會」를 창설하여 바이올린 개인교수는 물론 실내악, 관현악 운동을 처음으로 전개했고,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음악잡지「音業界」를 편집, 발행하여 7호까지 계속했다.
   192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음악학원 본과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 음악주임교수로 활약했다.
   1931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시카코에 있는 Sherwood Music College 에서 연구하여 1932년 6월에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1933년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 교수에 취임하여 음악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바이올린 독주, 작곡, 실내악 운동, 관현악 운동, 음악평론, 음악출판, 창작 소설, 번역소설에 이르기까지 실로 눈부신 활동을 하였으니 그야말로 「천재 중에도 천재」라 해도 조금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참고로 8. 15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음악 잡지의 역사를 더듬어보고 넘어 간다면 다음과 같다.
   1. 음악과 문학 (홍난파, 黃錫禹편집)‥‥1921년 2월 창간.
   2. 음악계 (홍난파 편집 ) ‥‥1925년 창간.
   3. 음악과 시 (梁昌俊 편집 ) ‥‥ 1930년 창간.
   4. 음악 (崔聖斗 편집) ‥‥ 1934년 창간.
   5. 음악평론 (金福源 편집 ) ‥‥ 1936년 6월 창간.
   6. 음악교육 ( ? 편집 ) ·1935년 ?월 창간.
   위의 6종 중 「음악과 문학」과 『음악과 시 」는 창간호로 끝났고 「음악교육」은 2호까지, 「음악계」는 7호까지 나왔다.
   「음악」만은-최성두의 증언에 의하면 -44년 7월까지 최장수를 기록했다고하니 「음악서지(書誌) 목록(하) ‥‥河東鎬」(文藝振興 제7권 제12호)의 『음악잡지로는 처음발행되었으며 단호(單號)로 종식되었다. 』는 잘못으로 판단된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음악학원인 「硏樂會」의 회원 명부(1923년4월 ~ 1933년 6월 )가 최근에 발견되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홍재유(洪載裕), 곽정순(郭正淳), 김태오(金泰午), 피천득(皮千得), 김성태(金聖泰), 이석화(李碩和), 문학준(文學準), 전희봉(全熙奉).
   이 밖에 채동선(蔡東鮮), 홍성유(洪盛裕), 홍지유(洪志裕)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으니 오늘날 정경화- 김영욱 - 강동석이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는 것이 결코 기적이나돌연변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1986, 8월호 사보 삼익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