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나의 창작실

나  운  영

   1 · 4후퇴 때 부산 피난시절이 가끔 생각난다.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의 후의로 방 하나를 겨우 얻어 침실 겸 식당 겸 창작실로 사용하면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편 )를 단 3분만에 반주까지 완성했으니 작품이란 역경 속에서 더 좋은 것이 탄생하나 보다.
   「가장 이상적인 창작실을 따로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만약 그런 창작실을 꾸며 놓았는데도 좋은 작품이 안 나온다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길 때도 있으니‥‥
   미술가들은 반드시 넓은 아뜨리에가 있어야 당장 작업을 할 수 있겠지만 작곡가의 경우는 그런 것이 필수조건은 아니다. 그저 조용한 단독방이 있으면 되고 또 피아노가 꼭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피아노가 있다면 머리속에서 구상한 것을 당장 피아노로 실험해 볼 수 있으니 편리하긴 하겠지만 도리어 피아노가 방해가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교향곡이나 협주곡 같은 대곡을 쓰려면 우선 오랜 기간 치밀한 구상을 해서 메모를 한 다음 테마가 떠오를 때까지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늘 나가는 다방을 찾아 간다거나,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온다거나, 성당에 들어가서 묵상을 하고 나온다거나, 충격적인 영화를 보다 나온다거나, 비 내리는 밤 지저분한 됫골목을 지나간다거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마를 찾아헤맨다. 이렇게 해서 테마가 많이 떠오르면 그것을 모두 스케치해 놓았다가 3.4일간 호텔에 들어가서 작품완성을 위해 몰두하면 계획했던 곡들이 쏟아져 나온다.  
   30년전만 해도 나는 명동의 코지코너가 내 단골다방이어서 그 곳에 가면 좋은 테마가 항상 떠올라 그 시절에 「교향곡 제 4 · 5 · 6 · 7 · 8번」을 비롯해서 「피아노 협주곡 제1 · 2번」, 「8인 주자를 위한 시나위」 등등을 작곡했었는데 그 때가 지금도 그립기만 하다.
   나에겐들 어찌 창작실에 대한 욕심이 없겠는가? 아무리 환경이 좋은 호텔이라도 내집 만큼은 못한 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창작실은) 첫째로 동서남북으로 창이 있는 밝은 방이 좋다. 사방에 책상을 각각 놓고 네 작품을 동시에 써 나간다. 가령 동쪽 책상에 앉아 곡을 쓰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서쪽 책상으로 옮겨서 다른 곡을 쓴다. 그러다 보면 먼저 곡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되는데 그럴 때에는 지체 없이 다시 먼저 책상으로 옮겨 앉아 작업을 계속한다. 이런 방법으로 곡을 계속 쓰다보면 네작품이 거의 동시에 완성되게되니 권태와 피로를 모르고 완성의 기쁨을 맛보게된다.
   둘째로 건물이 단층이 아닐 때에는 높은 층일수록 좋다.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높은 곳이어야 전망이 좋기 때문이기도 한데 특히 네온싸인이 아른거리는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셋째로 전화, 텔레비젼, 전축, 라디오가 없어야 한다. 전화가 필요 없는 것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기 위함이요, 그밖의 것들은 남의 음악을 듣지 않기 위함이다. 나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데 있어서 남의 음악은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앉아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할 때에만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중에는 신문도 물론 읽지 않는다. 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일체의 방해물에서 완전히 격리된 상태에서만이 정신집중이 잘 되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사실 이 세가지를 바란다는 것도 혹시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슈베르트는 방 하나에 온 식구와 함께 살았어도 명작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에게 창작실이 어디 있었겠는가? 작가가 좋은 창작실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환경만을 탓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서 창작실이란 도처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직장의 연구실도 훌륭한 창작실이요, 온 식구가 모두 잠들고 있는 침실도 창작실이요, 다방도, 버스나 기차간도 창작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식구들이 모두 외출한 빈 집이야말로 가장 좋은 창작실 구실을 하게도 된다. 어떤 때에는 길을 걸어가다 말고 담모퉁이에서 혹은 거리의 벤치에 앉아서 작품에 열중할 때도 있다. 소위 악상이라는 것은 홀연히 떠오르는 것이요. 그 기회를 놓치면 또 다시 같은 것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창작실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환경을 탓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역사상의 위대한 작곡가들 중에는 환경이나 여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더 많은 명작을 창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림 그릴 종이가 없어서 담배갑 은박지 종이에 그림을 그린 이중섭 화백, 오선지가 없어서 식당 계산서에 줄을 긋고 작곡한 슈베르트를 생각하면 우리의 환경이나 여건은 너무나도 좋은 편이 아닐까‥‥‥

   우리들에게는 창작실 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WHAT-HOW-WHY이다.  즉 우리는 작곡하기 전에 「첫째로 무엇을 쓸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이 병들어가고 있는사회, 점점 썩어가고 있는 나라에서 나는 무엇을 써야겠는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겠다.
   나는 12년째 「신작성가(新作聖歌) 월례 발표회」를 계속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이 사회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은 성가를 작곡함으로써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하는데 있고 또한 이것이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야 성가 이외에도 쓰고 싶은 곡이 많이 있지만 이런 것은 모두 내년 초로 미루고 초지일관 이작업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조금도 후회 없이 하고 있으니 마냥 즐겁기만 하다. 내가 갈 길을 찾아서 하고 있으니 말이다.
   둘째로 「어떻게 쓸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선토착화 후현대화(先土着化 後現代化)는 나의 작곡신조이다.
   우리 국악에서 뿌리를 찾아 그것을 발전시켜서 현대화해야만 세계성을 띤 우리 민족음악이 창조된다는 이야기인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토착화(土着化)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국악을 모르는 사람이 어찌 세계성을 띤 한국음악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리듬, 멜로디에서 먼저 토착화의 과제를 해결해야 하고, 하모니(화성)에서 현대화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즉 리듬, 멜로디가 아무리 한국적이라 하더라도 이에 서양고전 화성(3화음, 7화음 등 三度和聲)을 붙여서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데, 나는 이일을 위해서만 12년을 고심해 오고 있고, 이제는 드디어 확신이 섰으니 이것이 곧 나의 한국화성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현대화성론 제10강을 참조해 주기를 바랄 뿐이나 이제 우리나라의 음악은 동요, 찬송가로부터 가곡, 독주곡, 실내악곡, 교향악곡,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먼저 화성 자체를 바꿔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역설한다. 극히 일부 국악인 중에는「국악에는 화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언어도단이다. 화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화성을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것 뿐이다. 국악 멜로디에서 화성을 찾아내면 되는 것이다. 국악을 화성화 화는데 있어서 수직적으로 화음을 붙이는 것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대위법적 처리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로 「왜 그렇게 써야할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스타일과 테크닉의 선택이 항상 문제가 되는데 그 중에서도 스타일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스타일을 결정하면 테크닉은 이에 뒤따라 해결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를 가장 존경하는데 이 두 예술가는 그 스타일이 늘 변모하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로서 스타일 자체를 바꾼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흔히 우리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덕이는 작가를 많이 보게 되는데 그 까닭은 스타일을 바꾸고 싶어도 바꿔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한가지 스타일로만 작품을 제작한다면 보다 나은 작품을 기대하기가 힘든 법이다. 왜냐 하면 소위 이하동문(以下同文)이나 동공이곡(同工異曲)은 고사하고 자기 것의 모조품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주 스타일을 바꿔야만 보다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어떤 작품이 나 작가를 평가할 때 그 스타일만을 대상으로 삼는 것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때나 작품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품이 스타일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릇 스타일이 작품의 가치를 판정한다면 베토벤은 논의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되고 말 것이다. 현대음악, 전위음악, 전자음악의 스타일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와 작품의 평가에 있어서 스타일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즉 20세기 후반기의 작가라고 해서 신고전주의적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스타일을 택하든 그 작품 자체가 잘 됐느냐 졸작이냐만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왜 그렇게 써야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수많은 스타일, 수많은 테크닉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가  그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고 생각할수록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을 나는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돌이켜 보면 1979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12년 동안의 나의 창작기를 나는 결코 공백기(空白期)로 보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 기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이 기간 동안에 나는 탈서양화(脫西洋化)의 고행을 감수해 냈기 때문이다. 1,000곡을 육박하는 짧고 혹은 긴 곡을 통해서 나는 부단히 새로운 기법을 모색해 왔고 실험을 거듭해 왔다. 이제는 드디어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니 내년부터는 소신껏 나의 길을 달려갈 것이다.
   일찍 홍난파 선생께서는 작곡 전공의 길을 떠나려는 나에게 "우리나라의 음악을 쓰라. 네 자신의 음악을 쓰라"고 당부하셨었는데 그 때의 그 말씀을 나는 한시라도 잊은 일이 없다. 홍난파 선생(1898~1941), 거슈인(1898-1937), 아이슬러(1898-1962), 해리스(1898~1979), 그리고 스즈끼 신이치(1898-), 고노에 히데마로(1898-1973), 쿨렌캄프(1898-1948)는 동연배인데 황무지와 조금도 다름 없는 한국에서 홍난파선생이 남기신 위대한 업적을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는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멋진 창작실을 마련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창작실이 없어서 작품이 못 나오는 것은 아니다. WHAT-HOW-WHY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이 안 나오는 것 뿐이다. 「못 나오는 것」과 「안 나오는 것」은 다르다. 그리고 마음을 비워야만 좋은 작품이 탄생하는 법이다.


<1991. 봄·여름호 삼성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