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찬송가 개편작업에 신중을 기하라
- 찬송가위원회에 드리는 공개장 (1966년 발표) -

나  운  영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56년 3월에 나는 『한국기독시보』에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한국찬송가개혁론」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제의한 일이 있다. 곧
  1. 외국의 국가와 민요의 곡조를 뺄 것.
  2. 동곡이가사(同曲異歌詞)의 곡조를 뺄 것.
  3. 비음악적인 곡조와 경박한 곡조를 뺄 것.
  4. 서양조의 색채가 너무도 진한 곡조를 뺄 것.
  5. 비교적 동양조의 곡조를 많이 편입시킬 것.
  6. 가사와 곡조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을 고칠 것.
  7. 한국찬송은 금주가(禁酒歌)(합동 486장)를 제외하고는 1곡도 없으니 찬송가 원가사에 의한 한국찬송을 작곡 편입시킬 것.
  8. 한국사람의 신작가사에 의한 한국찬송을 작곡 편입시킬 것 등등

  한편 특히 한국찬송에 있어서는 서양찬송가의 모조품. 유사품이 아닌 - 한국적 정서가 넘쳐 흐르는 곡조이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일이 있다. 그후 1963년 2월에야 비로소 NCC에 <찬송가위원회>가 조직되어 그때부터 합동찬송가의 개편작업이 자못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을 보고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긴하나 - 이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터에 연합기독신보 (7월 3일부)에 기재된 「찬송가개편작업에 이상 있다 - 선택기준에 미비점 많아, 완벽된 찬송가 되도록, 최종단계에서 졸속 피해야」와 크리스챤 신문 (7월 2일부)에 기재된 「찬송가개편과 이윤균배」와 기독교세계 (7월 7일부)에 기재된 「백해무익한 무책임한 신문보도」와 교회연합신보 (8월 7일부)에 기재된 「비판은 발전의 한 과정 - 찬송가개편사업에 재언, 안신영(安信永)씨의 욕설에 답하여」를 읽고 서글픔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논쟁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는 바이나 만약에 내가 그 그릇된 것을 알고도 좌시하고만 있다면 공범의 죄와 벌을 면키 어려우므로 감히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도시 찬송가위원들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이상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논쟁의 발단이 75장과 465장에 있는 듯 한데 <제6회 찬송가위원회 총회 보고서> (1966년 4월 4일)를 보면 75장과 465장이 그대로 들어 있으므로 외국민요와 국가의 곡조가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주어 오해를 산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재론을 요치 않으나 이밖에도 난점(難點)은 허다하다. 우선 안신영 가사위원장의 발언을 중심으로 검토해 볼때 첫째로 「독일 코랄은 선율이 없다고 말했는데 선율이 무엇인지나 알고 그러는지 가소롭다. 코랄이 선율이 없다면 무엇이 선율이 있는가?」라고 했는데 이것은 「영미(英美)의 찬송가에 비해 그다지 선율적 흥미가 적다」는 뜻이 서투르게 표현된 것으로 해석한다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8․15 해방 전에 원산교회(元山敎會)에서 발행된 『카톨릭성가집』에 코랄이 많이 편입되었던 까닭에 즐겨 불리워지지 않았던 것을 상기한다면 개신교에서도 그 전철을 밟지 말아야할 것이다.
  둘째로 「서구적 스타일을 모방했거나 한국적인 색채가 전혀 깃들여 있지 않다면 채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이해가 안 간다」고 한 것은 적어도 한국 사람으로서는 감히 할 수 없는 망언이다. 한국적인 색채는 박자․리듬․멜로디․화성 등에서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나타낼 수 없다고 한다면 서양음악의 극히 초보적인 작곡 상식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은 원이로되 작곡기법이 미숙하여 한국적 색채를 표출 못하는 것에 대해 자책을 느껴야 마땅한 일이거늘 이 주장 자체가 잘못 됐다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셋째로 「가사 번역위원 중에 시인이 없다는 말은 위원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귀등대등 지껄인 말이다」라고 한 것은 가소로운 말이다. 혹 가사위원들이 시인으로 자처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나 사실상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시인은 한사람도 없지 않은가? 전공(專공攻)과 전공(全攻)은 다르다. 순시(瞬時)라도 자신을 시인으로 착각하지 말아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왜냐하면 개편작업에 중대한 과오를 범할 가증성이 충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총회보고서를 중심으로 검토해 볼때 넷째로 104장 (그 어리신 예수)은 스필만 작곡의 「Flow Gently Sweet Afton」의 곡조의 제1부와 제3부 즉 3분의 1만을 떼낸 곡이므로 이에 찬송가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의당 제외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266장 (내 선한 목자)은 동독 남부의 민요로서 「Treue Lieve」란 곡조이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여섯째로 569장 (오늘 모여 찬미함은)은 베토벤 작곡의 「제9교향악」 제4악장의 주제 (쉴러 작시의 환희의 송가)이므로 제외되어야 한다.
  일곱째로 291장 (내 주여 뜻대로)은 베버 작곡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의 서곡에만 나오는 순기악곡이므로 이에 찬송가 가사를 붙여서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제외되어야 한다.
  여덟째로 54, 75, 94, 104, 108, 195, 231, 266, 291, 308, 309, 434, 465, 569장 등등은 새로 작곡하되 한국적인 색채의 것이어야 한다.
  이번에는 개편작업에 있어서의 기본적 태도를 중심으로 검토해 볼 때 아홉째로 새로 번역된 가사는 먼저 권위 있는 시(詩) 전문가들의 수정 합의를 거친 다음에 음악위원회의 감정을 받아 결정지어야 한다.
  열째로 특히 외국 찬송가의 경우에 있어서 악보 중 1음표, 1기호, 1부호라도 자의로 고치지 말라. 음악위원이던, 간사이던, 누구를 막론하고 정3화음을 부3화음으로, 또는 3화음을 7화음으로 고친다던가 원곡에 없는 3음을 넣는 등 이러한 권한은 없으니 특히 이점을 명심하고 무모한 짓을 말아주기 바란다.
  열한째로 새로 선곡이 결정된 것은 전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동안 찬송가위원회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찬송가를 발행한 일이 있는데 예를 들어 1956년 2월 28일에 발행된 찬송가 중에서 2장은 가사가 3절로 되어 있으나 사실상에 있어서 9절 이상의 느낌을 주는 매우 장대한 곡이며, 6장과 7장은 기악반주 (피아노 또는 오르간)로 되어 있으므로 혼성4부합창곡으로 바뀌어져야 하며, 12장은 주선율뿐만 아니라 하3성(下3聲)에도 파생음(변화음)이 너무도 많이 나오므로 정확하게 부르기 힘들어 부적당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좀 더 우리에게 친근미가 있고 아울러 실용가치가 있는 곡조를 택했으면 하는 느낌이 든다.
  열두째로 사례금 천원을 걸고 찬송가 가사를 공모했다고 하며 한편 발행을 서두르는 뜻에서 작품을 새로 위촉하지 않고 이미 작곡되었던 자천작품(自薦作品)․구작(舊作) 중에서 선곡하기로 했다는 것은 너무도 경솔한 짓이라고 단언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한국작품을 너무도 가볍게 다루는 처사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더욱이 추곡(秋穀)이 출회될 때에 나와야 찬송가가 많이 팔린다는 탁상공론 때문에 졸속을 면할 수 없고 이 때문에 한국 작품이 희생의 제물이 되어서야 될 말인가? 맹성(猛省)을 촉구한다.
  이밖에도 나의 마음을 심히 불안하게 만들어주는 문제가 많으나 지면관계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찬송가는 매년 또는 수시로 개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당초의 계획대로 5년 혹은 5년 이상이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좋으니 음악위원들은 이제부터라도 각 교파의 여론에 귀를 기울여 세계 각국 각 교파의 새찬송가 자료를 모집하여 좀 더 여유 있게 선곡하기를 바라며 다음으로는 작곡을 전공한 분들에게 새로 작품을 위촉하여 참으로 우리 생리에 맞는 한국찬송을 선정하는데 온갖 성의를 다해 주기를 열망한다. 만인은 주시하고 있다. 만약에 교계의 여론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졸속 강행한다면 개악(改惡)의 시비를 영원토록 면키 어려우리라.
  끝으로 나는 처음부터 이 작업에 참여하여 현 합동찬송가 중에서 새합동찬송가에 수록하기 위하여 372장을 추려 내는데 까지 고군분투한 일이 있었으나 이것으로 나의 제1단계의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되어 그동안 소홀했던 대작인 「교향곡 제4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등에 온갖 정열과 정력을 쏟기 위해 1964년부터는 음악위원을 사양했을망정 이 성업(聖業)에 누구보다도 지대한 관심을 늘 가지고 있으므로 위에서 지적한 열 두가지 조건이 원만히 해결되기를 음으로 양으로 바랄 뿐 - 이 작업이 그릇된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좌시하고만 있으려드는 기독도(基督徒) 아닌 기독도(基毒徒)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기독연합신보 1966. 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