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선 현대화 후 토착화>에서 <선 토착화 후 현대화>로의 변신

나  운  영

   나는 어릴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국악합주를 통해서 영산회상 같은 정악(正樂)은 물론 판소리 같은 속악도 좋아했지만, 운명교향곡(베토벤 작곡)의 유성기판을 통해서 양악도 좋아했다. 그런데다가 태어난 곳이 서소문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길가집인지라 상여가 지나갈 때의 대취타(大吹打) 즉,국악 브라스밴드에 그만 넋을 잃었고, 한편 구세군 노방전도대의 양악 브라스밴드에 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음악환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미동보통학교 시절에는 전교에서 노래를 제일 잘했을 뿐만 아니라 5학년 때부터 100소절이 넘는 기악곡의 멜로디를 작곡했고, 중앙고보 3학년때에는 서정소곡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다. 마침 이 해(1936년)는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으로 백의민족의 이름을 온세계에 떨친 해였기 때문에 나도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아 장차 작곡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중앙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가곡 「가려나」가 동아일보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당선됨으로써 드디어 작곡전공의 길이 열려 일본유학을 하게 되었는데 음악학교에서 작곡레슨을 받을 때마다 스승에게서 그야말로 충격적인 교훈을 받았다.
   「너는 서양음악을 모방하려 들지 말고 너의 나라의 음악-아니 너 자신의 음악을 쓰라.』

   <선(先)현대화 후(後)토착화>는 내가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50년이 될 때 까지의 작곡신조였다. 그런데 6.25사변을 겪으면서 심경에 일대변화가 생겼다. 즉 <선(先)토착화 후(後)현대화>로 작곡신조가 바뀐 뒤로 부터 나의 창작 제 2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가곡 「접동새」, 부활절 칸타타 중에서의 「골고다의언덕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산조」, 「8인주자를 위한 시나위」, 「교향곡 제 9번 "산조"」등을 비롯하여 벌써 79회를 맞이하는 『신작성가 월례 봉헌예배』를 통해 발표된 600곡에 이르기까지 나는 줄곧 <선토착화 후현대화>의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집념인 것 같다.
   자고로 천재는 단명하다고 했는데 나는 그야말로 둔재 중에도 둔재인지라 120세는 너끈히 살것같이 생각되니-이제 겨우 반생을 산 셈인데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볼때 한스러운 것이 하나 있다. 23세때부터 대학교수 생활을 해오다보니 가르치면서 배운것도 많았지만 창작에 전념할 수 없는 것이 늘 아쉽기만 했다. 즉 교단생활과 작가생활은 완전한 이중생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실에서는 아카데믹한 수법을 주로 가르쳐야 하고, 작곡할 때에는 그 아카데믹한 수법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2년 후면 정년퇴직을 하게 될 것이니 그때부터는 나도 작곡가 본연의삶을 누리게 될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창작이란 참으로 힘든다는 것을 늘 느끼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감각을 앞세우고 겁없이 작곡했으나 요즈음에는 철학 · 미학을 바탕으로 삼고 조심스럽게 작곡을 하게되니 좀 철이 든 탓일까‥‥ 쓰면 쓸수록 <내나라의 음악>-아니 <나 자신의 음악>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실감하게 되니 말이다. 창작을 할 때 항상 나는 나자신을 채찍질한다.
   첫째로 남의 작품을 표절 또는 모방하지 말 것.
   둘째로 내 작품도 표절 또는 모방하지 말 것.
   셋째로 국적불명의 작품 또는 외국2세(二世)적인 작품을 쓰지 말 것.
   넷째로 오직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할 것.
   다섯째로 될 수 있는대로 작품마다 스타일과 테크닉을 바꿀 것.
   즉, 남의 것의 모조품은 물론이고 내것의 모조품도생산해서는 안되며, 예술을 떠난 현실참여를 하지말것이며, 이하동문(以下同文)격인-매너리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하면 피카소나 스트라빈스키가 가장좋은 표본이 된다. 카멜레온적 작곡가 또는 천의 얼굴을 가진 작곡가가 되어야만 작품마다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엄격하게 말해서 진정한 의미의 작품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어야 하며 한 시대를一아니 오늘을 대변하는 산 증언이어야 한다고 말할때 무릇 창작이란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되니 이것도 나이 탓일까‥‥

   끝으로 한국음악의 미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나는 국악이란 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즉 국악이란 한국음악의 준말이어야 하는데 실제에 있어서는 서양음악이 아닌-동양음악 중에서도 한국음악에 국한된 말로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악이란 말 대신에 <한국전통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옛것을 그대로보존·계승하는 것이 전통음악이요, 그것을 발전시켜서 새로 만든 것은 <한국현대음악>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흔히 우리나라의 양악-즉 서양음악수법으로 작곡된 현대음악 만을 한국현대음악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국악기 만으로 작곡된 곡이나 서양악기에 국악기를 섞어서 작곡된 곡도 <한국현대음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점에서 볼때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음악콩쿠르에 있어서 작곡부문을 서양음악작곡과 국악작곡으로 나누어서 부르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자체가 잘못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으로의 우리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양악인과 국악인·양악기와 국악기 ·양악이론과 국악이론의 구별을 없애야 되며, 근본적으로 악기조율부터 12평균율로 바꿔논 다음에 미분음처리를 해야 한다. 그래야만 첫째로 자유롭게 전조(核調)를 할 수 있고 어느 악기와도 합주를 할 수 있게 된다. 만약에 국악인 ·국악기·국악이론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향토음악(민속음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나라에도 향토음악(민속음악)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오로지 전통음악을 보존·계승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대로만 나가면 세계성을 띤 현대음악으로서의 한국음악-즉, 민속음악에서 소재를 발굴 · 발전시켜 세계성과 현대성을 띤 한국민족음악이 창조될 날도 그리 멀지 않다고 나는 전망한다.


<1986. 5/6 격월간 『해태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