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책과 나의 인생

나  운  영

   내 고향은 서울 서소문 밖 의주로 1가-지금의 치안국 근처이다. 우리집에서 서울역 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구서림」이란 책방이 있었는데, 이 작은집은 춘향전, 구운몽, 신구잡가, 최신유행창가집 같은 책을 출판하는 가게로 상당히 유명했다.
   미동보통학교 4학년 때까지는 고향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구서림에 자주간 일이 있으나, 그후 중앙고보를 졸업할 때까지는 주로 관훈동에 있는 「금항당서점」(지금의 통문관)과 내자동에 있는 「유길서점」을 늘 찾아가서 헌책을 사 모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진고개 (충무로)엘 가면 일본사람들이 경영하는 「문광당서점」(헌책방)에 먼저 들르고 다음에「대판옥서점」, 「일한서방」에 가서 신간서적을 사오기도 했다.
   나의 책방 행각은 비단 서울에 국한된 것이 아니어서 1·4후퇴 때에는 부산 보수동의 헌책방을 헤매는 일이 그야말로 하나의 일과였고, 대구엘 가면 의례히 「문흥서점」에 들르기도 했다. 일본 유학시절에는 동경에 있는 「간다고서가」에서 종일을 살곤 했다.

   내가 찾는 책은 대개 음악이론서적과 악보이지만, 하도 자주 드나들게 되니 어느 집 ·어느 곳에 무슨 책이 있는지 까지도 기억할 수 있어 귀한 책을 남들보다 많이 사모을 수가 있었다. 간혹 친구와 함께 가는 경우에도 내 친구 눈에는 잘 안띄어도 내 눈에는 잘띄기 때문에 재빠르게 나만 책을 살수 있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책은 임자가 따로 있는 모양인가 보다.
   서울의 경우, 8·15해방 전에는 헌책방이라면 관훈동이 중심지였으나 6·25사변 후로는 청계천 5.6.7가에 더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쪽으로 일부러 가야 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희귀한 책을 비교적 싼 값으로 살수 있다는 욕심이 앞서게 되니 정신없이 헤매어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책을 사모으려면 네 가지 요령을 알아야만 한다.
   첫째로 책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값비싼 외국서적을 사가지고 돌아와 보니 상당한 부분이 빠졌거나 중복된 낙정본일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책의 발행연도를 점검해야 한다. 초판이냐, 재판이냐, 개정판이냐,증보판이냐를 분간해서 꼭같은 책을 두번 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세째로 당장 필요한 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장 필요하지 않은 책이라도 미리 미리 사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책이란 한번 기회를 놓치면 그 책을 다시 만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때에는 책을 만지적거리다가 놔두고 그 집을 몇발자국 나갔다가 되돌아와 다시 찾으니 이미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말 때가 있으니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찾던책을 발견했을 때에는 책값에 구애받지 말고 일단 살 결심을 하되, 돈이 없으면 예약이라도 해놓아야 한다.
   넷째로 전공이 무엇이든 간에 사전류와 역사에 관한 책은 반드시 먼저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자세이다. 도서관 책에 의존할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하고 최소한 『자기만의 도서관 」을 꾸려 놓아야만 언제든지 필요할 때 마음껏 활용할 수가 있다. 특히 음악의 경우 「이론서적+악보+음반」을 모조리 모아야만 제대로 연구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시대적 양식에 따라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아야 하니 어려움이 많다. 전기낭만파에서 근대파로 건너 뛰거나, 후기낭만파에서 소위 전위로 건너뛰어서는 안될 것이 아닌가.
   삼치 (三痴)란 말대로 책이란 빌리는 것도 아니고,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빌렸던 것을 되돌려주는 것도 아니라고 하니, 도서관이나 어느 개인에게 의존할 생각을 버리고 각자가 부지런히 사모으는 것이 원칙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희귀한 자료는 복사해서라도 서로 교환하여 연구에 도움을 주고 받는 풍토가 아쉽기만 하다.
   "책은 나의 스승이요, 인생의 반려자이니 이다음에 자손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이냐? "는 물음에 "금은보화나 집보다 책을 물려주고 싶다"고 나는 주저없이 대답한다.


<1988. 겨울 3호 옛책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