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5집 '토착화와 현대화'

유성기 애청 60년

나  운  영

   나와 유성기와의 만남은 6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생물학자이자 아마추어 국악인이었던 나의 부친이 돌아가신 직후 수많은 골동품과 국악기들 틈에서 유성기와 유성기 판이 내 눈에 띈 것이다. 불과 열댓 장 밖에 안되는 판들 중에는 특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F.샬크 지휘) 이 들어 있었다. 나는 이 곡을 무시로 듣고 또 들었다. 이밖에 베버의 서곡  「환호의 소리」와 베르디의 「가극의 정화」도 있었는데, 뭐니뭐니해도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운명」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음악적 유산인 유성기와 유성기판과 함께 자랐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돌체 다방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다방은 고(故) 하석암 선생이 경영하던 음악감상실이었는데, 나는 수많은 서양명곡을 여기서 접할 수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도 나는 음악다방에서 매일 살다시피 했다. 그때 내가 가장 즐겨 들었던 곡은 바르토크의 「현악4중주 제1번」과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었다.
   1943년 귀국 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유성기 판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귀와 눈에 의한 콜럼비아 음악사 제5부一현대음악편』을 구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나는 현대 음악의 사도가 되었다. 작곡가로서 내 앞날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나는 이때에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 미요의 다조 음악, 하바의 미분음음악,발레즈의 극단주의 음악을 듣고 말 그대로 현대음악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6.25가 터지자 나는 수많은 판 중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과 바르토크의 「현악 4중주 제1번」, 『귀와 눈에 의한 콜럼비아 음악사 제5부-현대음악편』만을 가지고 피난을 내려갔다.  그 중 스트라빈스키는 도둑을 당했다가 되찾기도 했는데,그것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LP시대가 될 때까지 나는 주로 고(故) 정동윤 선생이 경영하던 「명곡사」와 고(故) 문영식 옹이 경영하던 「백조사」에서 SP판을 사모았는데 그 중에는 스트라빈스키의 「결혼」, 힌데미트 「현악 3중주 제2번」, 블로흐의 「히브리 광시곡」등이 있다. 특히 블로흐의 판은 포이어만이 독주하고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것으로 너무 많이 들어서 그만 판이 다 낡아 버렸다.     
   LP 시대가 되면서도 나의 레코드 수집열은 점점 가열되어 가기만 했다. 처음에는 주로 근대, 현대음악만을 사모았으나 언제부터인지 소위 명곡이라면 연주가별로 같은 곡을 모조리 모으는 버릇이 생겼다. 결국 오늘날 나는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37종을 비롯해 푸르트벵글러,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 모으고 있다. 또한 샬리아핀, 카루소, 갈리 ·쿠츠치, 코르토, 크라이슬러, 포이어만, 모이즈, 레너 현악4중주단, 카페 현악4중주단이 연주한 것이라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사고야  만다.    
   한편 국악판을 모으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춘향전』전집, 『심청전』전집,  『아악정수』를 비롯해 송만갑, 이동백, 박초월, 임방울, 김연수, 박녹주, 하규일, 정남희, 심상건, 오태석, 선우일선, 이화자 등 희귀한 것들을 꽤 많이 소장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홍난파 독주의 「애수의 조선」, 안기영 독창의 「마의태자」, 현제명 독창의 「니나」, 안병소 독주의 「인트로덕션과 타란델라」(사라사테 작곡), 현제명 4중창단의 찬송가 앨범 등등도 갖고 있는데, 이런 판은 역시 태엽을 감고 트는 유성기로 들어야만 제 맛이 난다.
   요즈음도 나는 SP, LP, CD 등을 가리지 않고 줄기차게 사모으는데 여념이 없으니 난봉치고는 무척 돈이 드는 난봉이다. 더구나 더 더욱 곤란한 문제는 음악을 하는 나로서는 레코드를 악보없이 들어서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으므로 레코드와 악보를 함께 사모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업자득이라고나할까‥‥

   유성기 판에 얽힌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기로 하고 나의 유성기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야겠다. 나는 '나팔 달린 유성기'를 갖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다. 그래서 30여년 전부터 고물상을 뒤지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특별히 부탁까지 해보았으나 좀체로 구할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6년 전 수소문 끝에 나팔 달린 유성기의 나팔은 없고 몸뚱아리만 있는 것이 있다기에 우선 그것을 사놓고 다음에 나팔을 구하자니 이 또한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고 일편단심으로 수소문하던 중 4년 전 드디어 나팔 만을 따로 구할 수 있었다. 꽤 비싼돈을 들여서 온전히 나팔 달린 유성기를 갖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되, 나는 이 물건이 우리집의 보물에 속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비록 대단히 낡고 허름한 것이지만 그래도 미제 빅터(Victor)이니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유성기의 나팔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는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빅터 상표의 하얀 강아지를 연상하리라.
   가까운 일본에 가면 동경 '간다 진보쪼 (坤田 神保町)에 「후지'(富士)레코드사」가 있는데 그곳에는 나팔 달린 유성기는 물론이고 수많은 SP가 연주자 별로 진열되어 있다. 나는 갈 때마다 반드시 그곳에 들러 희귀한 판과 레코드 바늘을 사오곤 하는데,이 재미는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현재 나는 포터블 유성기, 상자형(箱型)유성기, SP 전용 전축(Electrola-Victor)을 가지고 있는데 틀지 않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나는 몇해전 모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은 폭언(?)을 한 일이 있다.
   "나는 LP로는 음색(음질)을 듣고 SP로는 음악(연주 해석)을 듣는다"
   즉 LP의 연주가 아무리 연주 기교가 뛰어나고 소리가 좋다 해도 SP에 비하면 대체로 빠르기만 하고 무게와 깊이가 부족한 것이 안타깝다는 뜻이다. 저 푸르트벵글러나 샬리아핀, 크라이슬러, 포이어만, 모이즈 레너 현악 4중주단, 카페 현악 4중주단의 레코드를들어보라. 음색(음질)이고 기교가 문제 아니다. 연주 해석이 단연 돋보이니 그야말로 영원불멸의 명연주라 해도 절대 지나친 말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다행히 요즈음에는 SP의 복각반(復刻盤)이 세라핀(Seraphln)이나 펄(Pearl)의 레이블 명으로 나오기 시작했으니 이것이라도 부지런히 구해서 듣는 것이 좋으리라.


<1989. 4월호 음악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