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

나  운  영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소위 「러시아 5인조」의 주요인물입니다. 본래 이 「러시아 5인조」는 19세기 후반에 동구와 북구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국민주의운동으로서 그 본질은 낭만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서구의 전통적인 음악의 영향에서 벗어난 각 민족의 음악어법을 존중하고 강한 민족성을 구가하자는 움직임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민요, 민속무곡의 요소를 사용하고 자기나라 말에 의한 성악곡을 작곡하거나 자기민족의 전설, 고담, 역사, 자연, 생활을 소재로 한 가극 또는 표제음악 등을 작곡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국민주의의 선구자는 러시아의 그링카이며 「러시아 5인조」는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하는 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등 다섯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발라키레프는 본래 수학과 박물학을 전공했고,  퀴는 공과대학 교수, 포병소위였으며,  보로딘은 약학을 전공했고, 군의학교 교수였으며,  무소르그스키는 근위기병, 행정관사였고,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 후보생이었으니 모두가 음악전문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음악원의 설립자요, 궁정관현악단 지휘자가 된 발라키레프를 중심으로 모여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이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작곡가였으며 그들의 작품은 매우 대조적이었습니다. 즉 무소르그스키는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작품을 쓴데 비하여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비독창적이고, 아카데믹한 수법에 의한 작품을 썼습니다. 전자는 예술가요, 피아노곡, 가극을 썼으며 후자는 관현악곡, 가극을 썼습니다. 또한 전자는 인상파음악의 선구자로서 드뷔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후자는 관현악법의 대가, 원색적 관현악법의 창시자로서 라벨, 스트라빈스키,프로코피에프,레스피기 등 세계적인 작곡가를 길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한때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무소르그스키는 행정관사로서 박봉에 허덕이었으며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성을 그만두고 고정수입도 없이 다만 음악원의 작곡교수의 박봉만 가지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테이블 하나와 피아노 한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방해됨이 없이 공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즉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무소르그스키가 피아노를 사용하는 동안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사보(寫譜)를 하거나 관현악 편곡을 했고 , 점심시간 이후에 무소르그스키가 직장에 나가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피아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형편을 보아 서로 양보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서로 대조적인 작곡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소르그스키는 술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아편중독으로 일찍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그의 작품인 가극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치나>와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 등의 관현악편곡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의 편곡이 다소 원곡을 손상시킨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공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로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공동생활은 역사에 빛나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962. 12. 새교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