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작곡전람회. 브라질 음악법령 등

나  운  영

   리히노프스키 공은 베토벤에게 10년간 자기의 저택을 제공하고 그의 생활을 완전히 보장케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주 금요일에 「살롱 음악회」를 열어 그로 하여금 신작발표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마음대로 작곡을 할 수 있었고,  또 언제나 시연(試演),시청(試聽)을 해 보고는 수정하여 완전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작곡가에게도 집을 달라,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살롱 음악회」와 같이 우리 작곡가들에게는 자기작품을 들어 볼 수 있는 환경이 한없이 부럽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의 작품이 불완전하게나마 한번도 연주되어 보지 못한 채 책상 속에서 썩는 것이 얼마나 많을지 모른다.
   외국의 예로 본다면 작곡가가 작품을 쓰기가 무섭게 그것이 연주되고, 출판되고, 논의되는 것이 상례인데 이 나라에서는 작곡을 해 놓아도 연주되지 않는 형편이니 기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나라 연주가들이 우리 작품을 연주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 작품이 미숙해서인가 ?  외국작가의 것이라면 태작까지라도 정성껏 즐겨(?) 연주하면서 내 나라의 작품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연주하려 들지 않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성의보다도 악의(?)가 더 많은 까닭이나 아닐까 ?
  하기야 우리 작품 가운데 미숙한 것이 많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이것도 그 원인은 작곡가가 자작을 연주를 통하여 직접 들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미숙한 것을 수정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되는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그러므로 좀 심한 말일지 모르나 작곡가가 미숙한 작품을 내놓게 되는 것까지도 그 책임은 연주가가 반담(半擔)해야 할 것이 아닐까 ?

   그러나 한편 나는 다음과 같이도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 작품이 연주되지 않는 것은 결국 연주가들이 우리 작품을 연주하지 않는게 아니라 연주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 . .
   예를 들면 <봉선화>, <성불사의 밤>, <고향생각> 등은 부를 줄 알면서 그 밖의 곡을 안(못)부르는 것은 태만 또는 기술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  슈베르트나 베르디의 곡은 불러도 내 나라 것을 안(못)부르는 이 나라 연주가들의 심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도 작곡가로서 가장 슬픈 사실은 작곡을 해 놓고도 들어 보지 못하는 것일 것이나 , 그보다도 더 비통한 것은 자작이 그릇되게 연주되는 것이다.  작곡자 자신이 들어도 알 수 없게 왜곡되어 연주되는 것을 들을 때의 작곡가의 심정을 여러분은 추측하실 줄로 믿으므로 더 논하지 않으련다.
   브람스나, 팔리아의 대작을 연주하는 데도 충분한 연습을 못하고 대담하게 연주할 수 있는 이 나라 악단에서 우리 작품을 연주하는데 있어서의 양심이니, 성의니, 도의심을 논하는 자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 일이나 아닐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문제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실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연주되지 않는 곡이나, 연주할 수 없는 곡을 모아 마치 미술전람회처럼 「작곡전람회」를 개최하련다고 . . . 귀로는 들려 줄 수 없으니 눈으로나마 감상해 달라는 말이다.  만고 작곡전람회가 정말 이 땅에서 열리게 된다면 동서고금을 통하여 음악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될 것이나 결코 영광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외국서는 메시앙(불란서 현대작곡가)의 무박자 음악도,  하바(체코의 현대작곡가)의 미분음 음악도,  쉔베르그(독일의 현대작곡가)의 12음 음악(순정적 무조음악)도 활발히 연주되는데 우리네의 그리 어렵지 않은,  또한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은―신작품이 실연되지 못한 나머지 전람회를 갖게 되어서야 될 말인가 ?
   위에서 나는 「작곡가로서 가장 슬픈 사실은 작곡을 해놓고도 귀로 들어 보지 못하는 그것보다도 더 비통한 것은 자작이 그릇되게 연주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음악사상 초유의 사건을 머리 속에 그려 볼 때 위에서 말했던 것을 양보 또는 철회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불완전하게라도 좋으니 내 작품을 내 귀로 단 한번만이라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 까닭에 . . .
   前 「보스톤 교향악단」지휘자였던 故 쿠세비츠키 옹은 자국의 작곡가의 작품을 장려하기 위하여 자비로 음악출판사를 경영하여 신인들의 우수한 작품을 희생적으로 출판하는 한편 솔선하여 그 지난한 신작을 초연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국 이외의 작가의 작품까지라도 신작을 초연하는 귀한 일을 감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는 쿠세비츠키 없이는 현대음악을 논할 수 없고  따라서 그가 없었더라면 현대음악은 이만큼 발전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도 과히 망발이 아니게끔 되었다.  대중은 신작에 대하여 그다지 넓은 이해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작품이 너무도 새로운 까닭에 . . . 그러므로 신작은 작곡가가 생존한 동안에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악성(樂聖)들의 걸작품의 대부분이 후세에 비로소 그 진가가 알려진 것과 같이 . . . 이에 따라 연주가로서도 신작을 연주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불편하다.
  첫째로 그 연주자체가 평론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에 . . . 그뿐만 아니라 기술상 지난한 부분이 많이 나오는 까닭에 그 작품을 위하여 색다른 연습을 해야 하므로 고생에 비하여 별로 보람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연주가는 비록 현세에서는 보람이 없을지 몰라도 후세에는 반드시 그 보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인식해 주기 바란다.  마치 우리가 쿠세비츠키의 공로를 찬양하듯이 특히 신작을 초연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는 여기서 늘 강조하여 오던 브라질국의 음악법령을 또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브라질에서는 국내에서 개최되는 음악회에는 비단 자국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라도 반드시 브라질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법령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연주가가 독창곡이든 연주곡이든 합창곡, 실내악곡, 교향곡이든 간에 적어도 한 곡을 의무적으로 연주해야 되게 되어 있다.  이런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까닭에 빌라 로보스와 같은 위대한 작곡가가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제도가 실시되어야만 연주가는 우리 작품을 연주하게 되고 또한 작곡가들도 좋은 작품을 많이 쓰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우리 작품을 연주 안하는 연주가와 또한 이 나라처럼 창작활동이 활발치 못한 작곡가들에게는 본의가 아니나마 이러한 법령이라도 강력히 실시되지 않으면 민족음악의 수립이란 공염불에 그치고 말게 될 것이 아닌가 ?

   < 1954. 12.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