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고귀한 3 유훈(遺訓)
 ―홍난파선생의 15周忌를 맞이하여―

나  운  영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사업을 남겨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금(提琴:바이올린)독주회를 개최한 분도 선생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음악잡지를 발간한 분도 선생이며,  또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교향악운동을 전개한 분도 역시 선생이니 실로 선생께서는 연주, 작곡, 평론, 교육 등 음악 전반에 걸쳐 문자 그대로의 선구자이었다.  뿐만 아니라 브루흐,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한 제금(提琴)가로서 그리고 「조선동요100곡집」, 조선가요작곡집, 제금 독주곡  <하야의 성군(夏夜의 星群)>, <동양풍 무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관현악곡  <즉흥곡>, <소 론도>, <동양풍무곡>, 관현악부 독창 조곡 <나그네의 마음> 등을 남긴 작곡가로서 또한 연악회(硏樂會)를 비롯하여 중앙보육, 이화여전, 경성보육 등에서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로서,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모짜르트의 <주피터 심포니>를 연주한 지휘자로서 선생께서는 민족음악 건설에 위대한 공훈을 남기었다. 이같이 선생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 밖에도 선생께서는 「음악만필」, 「세계의 악성」 등은 물론이고 「처녀혼」, 「폭풍우 지난 뒤」 등의 창작소설을 비롯하여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유고의 「아! 무정」, 톨스토이의 「다복한 사형인」 이하 10편의 번역소설집과 그 밖에 역가(譯歌), 작사 등을 남기었으니 놀라웁게도 문필가를 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면 「사람은 죽어서 사업을 남겨야 한다」의 자신의 말씀을 실현하고 가신 것이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없은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
   일제의 탄압에 신음하면서도 선생께서는 <봉선화>를 비롯한 수 많은 동요와 가요를 작곡하여 보급시켰으니 이는 분명히 노래를 통한 일종의 민족해방운동의 실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929년부터 선생을 필두로 정순철, 박태준, 윤극영, 제씨(諸氏)의 동요가 속속 생산되어 제 2세 국민에게 민족혼을 불어 넣어 주었던 것을 회상하면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국민개창운동이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이미 일제가 물러간지 11년, 선생이 가신지 15년이 되었으나 오늘날 어린이들의 입에서는 민족적인 노래는커녕  <이별의 부산정거장>, <방랑시인 김삿갓>등 국산 일본색 유행가가 극히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선생의 공도 허사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배경이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고 한 선생님의 말씀을 이제 재음미해 볼 때 선생이야말로 또한 국민개창운동의 선구자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스승을 높이고, 음악을 배우는 청년은 선배를 욕하는 것에서부터 발족(發足)한다. 그러나 후자는 한국의 경우이다」
   이것은 선생의 쓰라린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예나 오늘이나 우리 악계가 어지러운 원인이 오직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선배를 높이는 사람은 또한 선배에게 높임을 받을 것이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15년이 되었으나 그동안 뜻있는 추모회, 추모음악회 등이 별로 자주 개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음악을 배우는 청년은 선배를 욕하는 것에서부터 발족한다」라는 말씀이 더욱 우리의 가슴을 찌른다. 8월 30일인 15주기일을 맞이하여 우리악단은 이상의 세가지 고귀한 유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새 출발을 해야 될 것이다. 끝으로 「난파전집」이 하루 속히 간행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1956. 8. 서울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