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새로운 음악교육을 위하여

나  운  영

    음악회는 시간이 지나고 회장이 찰 듯 말듯 하는데 악극단이 공연을 갖게 되면 두 시간전부터 장사진을 이루는 일대 혼잡을 가져오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학교에서는 명곡을 배워도 문을 나서면 「아 - 신라의 밤이여」를,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불러도 교회문을 나서면 「울려고 내가 왔던고」를 즐기는 원인이 무엇일까? 이 사실은 과거의 음악교육에 결함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제 나는 과거의 교육을 철저히 비평하고자 한다.
   첫째로 과거의 교육은 악보를 떠난 교육이었다. 즉 뜻을 알건 모르건 서당식으로 선생이 하는 대로 따라서 흉내 내는 원시적  노예교육이었다. 그러므로 설령 책을 본대도 악보는 보지 않고 가사만 보고 노래했던 것이다. 여기서 국어와 음악의 습득과정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글자 → 음부, 휴지부
       읽기 → 시창
       적기 → 청음
       짓기 → 작곡
       말본 → 악전
   이 표를  보면 어학과 음악은 같은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외국어는 잘해도 음악만은 악보 하나 볼 줄 모르는 기형인을 만들어 논 것은 과거의 교육의 결함 중에서도 가장 큰 결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악보를 가르치면 자연히 시창, 청음, 작곡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에 . . .
   둘째로 과거의 교육은 가창에만 치중했던 교육이었다. 음악과 창가는 동의어가 아니다. 창가란 음악교육과정인 가창, 기악, 감상, 창작 생활화 중의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감상교육이 등한했던 결과로 유행가에  매혹되게 되고 말았다는 것을 나는 지적한다. 즉 먼저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다음으로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지 못했던 까닭에 오늘날과 같은 유행가 중독자를 많이 내게 된 것이다. 음악이라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무조건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 까닭에 이것을 분별하여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음악교육의 첫걸음이다. 좋은 음악을 들려 주지 않고 또 음악감상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고 유행가를 부르지 말라, 악극단 구경을 가지 말라고 외치는 것은 마치 덮어놓고 영화관에 가지 말라, 에로잡지를 보지 말라는 것과 같이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유행가 대신에 건전하고 민족적인 국민가요나 신민요 등을 보급시키거나 라디오, 레코드 특히 영화를 통하여 음악을 감상시키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셋째로 과거의 교육은 성악 만에 의한 교육이었던 감이 적지 않았다. 즉 기악교육을 너무도 무시했었다. 기악이라고 해서 반드시 피아노, 바이올린만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북도 좋고, 나팔, 피리, 하모니카도 좋다. 이런 악기의 독주, 합주를 통하여 음악을 교육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는 과거의 교육은 창작지도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하였다.  물론 국민학교, 중학교에서 그 완전을 기할 수 없는 것이나 창작의 본능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교육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적어도 단순한 멜로디를 지을 수 있는 능력쯤은 가르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시가 절로 나오고,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같이 떠오르는 멜로디를 가지고 간단한 곡쯤은 지을 수 있도록 지도함이 필요하다. 끝으로 「음악의 생활화」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음악을 통하여 학교와 가정과 사회생활이 일원화되어야 할 것이다.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킨다. 음악은 생활을 좀 더 윤택하게 만든다. 음악도 군수품이다」 등등의 명구를 생각하며 우리 현실을 볼 때 모순된 느낌을 갖게 된다.
 「낙동강아 잘 있거라」는 군가적 유행가인가?  유행가적 군가인가?  일본 유행가사를 그대로 모방한 이런 노래가 신생 대한의 군가로 불리워지는가 하면 한편 전시 하 부산에서는 대낮에 악극단, 가극단 등의 구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현상을 볼 때 이 모든 것이 학교에서 배운 음악이 생활화되지 않은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 말한 과거의 교육의 결함을 시정할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을 우리는 시청각교육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음악영화 「모짜르트의 사랑」, 「악성 헨델」, 「토스카니니」, 「탱글우드의 음악학교」, 그리고 근일 상연된 「카네기홀」 등은 앞으로의 음악교육에 신 국면을 개척하여 주는 것일 것이다.

 < 1952. 시청각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