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진정한 음악평론가가 나오기를

나  운  영

   휴전 이후 우리 악단은 많이 발전되었다. 비록 교향악 연주회, 독주회, 독창회의 수는 적으나 질적으로 볼 때 그 수준이 향상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회가 있을 때마다 인상기(印象記), 방청기(傍聽記)와 흡사한 가지 가지의 평문이 속출되며 악단 뿐만 아니라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미치는 영향이 너무도 큼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음악전문가이든 음악애호가이든 간에 누구나 평을 쓸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어디까지나 진리에 입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자신이 쓰는 평문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한다면 이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오늘날 올바른 평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개중에는 자신이 직접 음악회에 가서 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내려치는 평론가가 있는가 하면,  연주도 하지 않은 곡을 격찬하는 평론가도 있음을 볼 때 한심하기 짝이 없다. 더욱이 연주 못하는 사람이 연주평을 쓰거나 작곡에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작곡평을 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라 할 수 있는 소위 수사학(修辭學)(?)을 가지고 마음대로 농필(弄筆)하는 것은 마치 정신병자에게 칼을 맡겨 놓는 것과 같이 위험한 노릇이다.
   음악평론은 음악미학에 대한 지식만으로 될 수도 없는 일이고, 명곡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평론가는 교육자의 위치에 서서 그 연주나 작곡의 결함과 그 원인을 지적함은 물론이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방향까지고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흔히 악평을 받은 자와 평론가 간에 논쟁이 벌어져 '지상(紙上)테러'가 '근육테러'로 발전되는 일까지 있는 듯한데 그 원인은 주로 무자비한 독설에 있는 것이며,  반대로 호평을 받은 자와 평론가 간에 다정한 교제가 벌어지는 것은 사전조치가 위력을 발휘한 증거인 모양인 듯도 하나 이 너그럽고 수사학적이고도 무책임한 평문이 그 호평을 받은 자를 멸망의 길로 이끄는 도화선이 되는 것을 종종 볼 때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음악평론가가 어서 속히 자연도태 되기를 기다릴 도리밖에는 없는 것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여기에 있어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이비 음악평론가가 호평을 쓰든 악평을 쓰든 간에 그것에 현혹되지 말고 그것을 분별하여 시시비비를 판단할 수 있는 교양을 가진 대중이 늘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음악평론가가 혜성과 같이 나타나기를 도저히 바랄 수 없기 때문에 . . .....

 < 1957. 5. 연세춘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