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음악만필

나  운  영

(1)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악성 가운데서 리스트(Liszt, 1811∼1886)만은 제외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걸작과 태작
(잘 되지 못한 작품)을  반반 남긴 사람은 악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까닭에 . . .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교향시>와 <헝가리안 랩소디> 중의 수 편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위대한(?) 태작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외화내허(外華內虛)야말로 그의 음악의 본질이 아닐까? . . .

(2)
   <전쟁교향곡>―일명 웰링톤의 승리―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베토벤(Beethoven, 1770∼1827)이―천재는 커녕―범인(凡人)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는 까닭에 . . .
   그러나 이런 정도의 곡을 쓰던 작가가 음악사상 최대의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된 것이 순전히 그의 노력의 결과임을 생각할 때 다시 없는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은 비단 나뿐이 아니니라. 작크 이베르의 말대로 작품이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권위있는 음악사가의 말에 의하면 바그너(Wagner, 1813∼1883)는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피아노를 칠 줄 몰라도 대작곡가가 될 수 있다는 논리는―불행하게도―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바이엘, 체르니 교칙본 정도의 곡도 치지 못했다는 것은  결코 아닌 까닭에 . . . 즉 그가 다만 바하, 모짜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쇼팡, 리스트, 브람스 등에 비하여 좀 서툴렀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4)
   일찍이 파리 음악원을 졸업하고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악단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했던 사티(Satie, 1866∼1925)는 자기의 실력 부족을 통감한 나머지 39세 때에 또 다시 파리음악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배(梨)모양의 소곡>, <마(馬)의 의상으로> 등 괴상한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마침내 「불란서 6인조(French Six)」의 지도자가 되었다.

(5)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 Korsakov, 1844∼1908)는 음악사상에 있어서 공(功)과 죄(罪)가 반반이라 할 수 있다. 즉 동지인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의 유작(遺作)을 편곡하여 후세에 남긴 것―그 자체는 분명히 공(功)에 속하나 그들 자신이 의식적으로 전통파괴 작업을 감행했던 것을―그들이 아카데믹한 수법에 미숙한 소치로 오인하고―그의 능숙한 필치로써 평범화 시키는데 심로를 기울였으니 실로 벌할 수도 없는 죄(罪)가 아닌가 . . . 개악(改惡)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 1958. 8. 연세춘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