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1집 '주제와 변주'
 

자화상



나  운  영



(1)
   나는 교육자, 음악이론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일종의 모욕감(?)을 느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나의 전공이 작곡인 까닭이다. 다만 나는 새로운 작품을 쓰기 위하여 또한 나의 작품을 이론적으로 해명할 수 있기 위하여 작곡이론을 연구하는 것이며 아울러 「한국적 작곡기법」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것뿐이다.  현재 나는―창작(A)과 교편(B)과 원고집필(C)의―3중 대위법적 생활을 하고 있다. 즉 ABC, ACB, BAC, BCA, CAB, CBA의 공식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밖에 틈이 있는 대로 나는 한국적 현대음악을 창조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음악은 물론 세계 각 나라의 민속음악과 민족음악을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각 나라에 있어서의 음악의 교류관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제주도민요와 몽고음악의 관계,  몽고음악과 아메리카 인디안의 음악, 우리나라 음악에 있어서의 주선율과 헤테로포니(Heterophony), 남도시나위에 있어서의 대위법, 한국적 화성의 모색, 12음 기법의 한국적 섭취, 농악의 장단 증감법, 한국음악과 일본음악의 차이점의 발견 등등이 나의 연구과제이다.
  나는 지난 해까지 작곡을 통해서 주로 한국음악의 정적인 면을 탐구해 왔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팔리아, 바르토크, 힌데미트 스타일의 연구에 따르는 한국음악의 현대적 작곡기법의 실천과 또한 한국음악의 동적인 면을 탐구하려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과제를 학생들과 같이 연구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백양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 1959. 3. 연세춘추 >


(2)
   책을 사 들이는 것과 음악감상실에 드나드는 것은 나의 음악학교 시절 때 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계속되는 버릇인가 보다. 그 당시 나는 5전(錢)이면 점심요기를 해결할 수 있었는데 그 돈을 아껴서 악보와 이론서적을 사 들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스코아(總譜)는 베토벤것 같은 것보다는 스트빈스키의 <봄의 제전>, 크셰네크의 <현악 4중주곡 제 3번>, 베베른의 <현악 3중주> 같은 현대작품을 주로 모았던 것이다. 그리고 교향악단 정기공연이 있을 때마다 미리 스코아를 사 가지고 악곡 분석을 해 본 다음에 음악감상실에 가서 매일같이 들어 보고서야 연주회에 갔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고전, 낭만의 스코아 까지도 자연히 모으게 되었고 또한 바르토크의 <현악 4중주곡 제 1번>, 스트라빈스키의 <결혼>, 베르그의 <서정조곡> 등 현대음악을 미칠 듯이 좋아서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면 결국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는 오히려 스코아를 통해서 또는 음악감상실에서 주로 공부한 셈이 된다.
   한편 나의 스승은 작곡 레슨 때마다 「서양음악을 모방하지 말고 너희나라의 음악을 쓰라」는 충고를 해 주셨다. 그 뒤로부터 나는 국악―특히 속악(俗樂)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무쏘르그스키, 드뷔시, 블로호, 팔랴, 바르토크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 오늘날 나로 하여금 현대적 스타일과 민족적 아이디어가 결부된 작품을 써야 된다고 주창(主唱)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끝으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작곡학도들은 항상 작곡실습와 이론공부를 병행시켜야 되며 힌데미트의 말대로 이론공부를 엄격하게 그러나 작품은 자유롭게 써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3)
   '나는 물에는 귀신이다' 이렇게 말하면 한강을 두어번쯤 문제 없이 헤엄으로 왕복할 수 있는  줄 알기 쉬우나 실은 물에 들어가면 당장에 가라앉아 버리니 한강이고 대천이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또 등산을 즐기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지난번 나는 백운대를 다녀 오면서 고진감래(苦盡甘來) 라는 철학(?)을 깨닫게 되었으니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가 아니라 그야말로 심로신역노(心老身亦老)격이 되어 버리지나 않았나 생각할 때 적지 아니 서글퍼진다. 그리고 보면 강도 산도 따라서 여름도 나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 . . 이상은 작년 모지(某誌)에 실렸던 수필의 한 토막이다.
   「여름방학은 나에게 있어서는 해산(解産)(?)을 하는 기간이다.」 몇 해 전 여름방학 때에 나는 <교향곡 제 1번(전 4악장)>을 불과 15일 동안에 관현악 편성까지 끝마친 일이 있다. 그때에 나는 교회 청년회 주최 캠핑에도 못 가고 방에 들어 앉아 거의 해수욕복 차림을 하고 작곡에 전심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온 집안에 엄중한 음향관제를 실시해 놓고서 나만은 야삼경(夜三更)에도 피아노를 두드리기가 일쑤였고, 멕스웰 커피를 장복하며 밤을 새우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른바 진통이니 잉태니 해산이니 하는 말을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올 여름에도 나는 <교향곡 제3번>을 끝마치기 위해 진통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 작품을 잉태한 것은 지난 5월에 국제음악제 때 <교향곡 제2번(1961년)>을 발표한 직후이다.
   무더운 여름에 방에 들어 앉아 작곡을 한다는 것은 백운대를 정복하는 것 이상의 자학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생리적현상이고 보면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몸도 마음도 아직 젊은 이때에 정력과 정열이 남아 있는 동안에 「개미」를 본받아 꾸준히 작품을 완성시켜야겠다.
   이것이 한 낱 공약에 그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온갖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 1962. 7. 연세춘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