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전위(前衛)음악은 전위(全僞)인가?

나  운  영

   1959년에 작곡된 바그너의 작곡 <크리스탄과 이졸데>나 1913년에 작곡된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나 1924년에 작곡된 쉔베르그의 <피아노 조곡>이나 1931년에 작곡된 바레스의 <전란(電難)>(Ionisation)은 각각 당대에 있어서는 모두 전위음악의 구실을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전위음악이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 누구든지 명확한 답변을 하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전위란 개념이 시대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구체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 행동음악 등은 전위음악이라고들 한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이 아닌 새로운 것이면 모두 전위음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12음음악도 전통적인 수법에 의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기법에 속하는 것뿐이고 또한 이것은 이미 보편화되어 버려 오늘날에 와서는 별로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구체음악이나 전자음악은 소재에 있어서나 작곡과정에 있어서나 전통음악에 비해 매우 혁명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한편 우연성음악이나 불확정성음악, 행동음악 등은 음악에 대한 기본개념 자체를 전적으로 뒤엎어 버린 것이어서 또한 마땅히 전위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전위음악은 넓은 의미에서 볼 때 구체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으로 나눌 수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행동음악만으로 규정짓는 것이 보다 진보적(?)인 견해라고 해도 과히 잘못된 말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체음악, 전자음악,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은 벌써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차차 빛을 잃어만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1948년에 처음으로 시도된 구체음악이 발전되어 1953년에 전자음악을 낳게 되었고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오늘날 전자계산기 음악의 출현을 보게 되었으나 1957년에 작곡된 힐러(Hiller, 1924∼  )의  <일리악 조곡>(Illiac Suite)이나 1963년에 작곡된 힐러의  <컴퓨터 교성곡>(Computer Cantata)을 들어 볼 때 이미 전자음악이 어느 한계점에 도달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한편 1951년에 작곡된 존·케이지의  <환상풍경 제4번>(Imaginary Landsdape No. 4)이나 1954년에 발표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로 시작된 우연성음악이 더욱 발전되어 불확정성음악을 거쳐 마침내 행동음악의 출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보다 전위성을 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에 행동음악이야말로 좁은 의미의 전위음악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행동음악이란 어떤 것일까? 예를 들어 피아노를 톱으로 써는 것이라든가 피아노를 돌과 나무판대기로 부셔 버리는 것이라든가 남녀가 벌거벗고 맨발로 피아노 건반을 밟는 것 등등을 소위 행동음악이라고 한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1962년 9월 첫 주말에 비즈바덴의 시립미술관에서 기묘한 전위음악제가 열렸다. 최첨단의 예술, 반예술 음악, 반음악, 시, 反詩 등등 선전플래카드를 내건 이 음악회에서 전위예술가들은 그랜드피아노에 돌과 나무판대기를 던져서 피아노를 부셔 버렸는데 이때에 들리는 소리에는 가지가지의 리듬, 멜로디, 화성, 음색과 무형식의 형식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가장 전위적인 음악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자극적인 초현대음악이요 동시에 우연성음악, 불확정성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행동음악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과연 이것이 예술이냐?」의 물음에 대해서 나는 「이것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아무리 행동음악이 전위적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반(反)음악이요, 「해프닝 쇼」이며 좋게 말해서 장난이요, 광적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이것은 전위음악이 아니라 전위(全僞)음악이요 음악이 아니라 음악(音惡)이요 반(反)예술적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따위의 행동음악은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존 케이지나 백남준은 전위음악가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물론 나는 이들에 대해서 고의로 과소평가하려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나이 립밴윙클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의 행동음악에 대해서 혹시 과대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제 존 케이지가 피아노 독주곡  <4분  33초>를 발표한 일이라든가,  백남준이 「섹스 음악」을 발표한 일을 두고 생각해 볼 때 그 결과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아이디어라 할 수 있다. 마치 모든 과학자들이 처음에는 기인 또는 범인으로 오인당한 일이 있듯이 존 케이지나 백남준도 이와 같이 다루어지기 쉬우나 어쨌든 오늘날 이들의 행동음악이 세계각처에서 심심치 않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을 우리는 주시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이비 존 케이지」와 「사이비 백남준」을 경계해야겠다. 즉 이들이 이미 한 짓을 뒤늦게 흉내낸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특히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오히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진짜와 가짜, 가짜적 진짜와 진짜적 가짜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현대인은 시대의 흐름을 이해해야 함은 물론 싫든 좋든 전위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전위음악을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이런 음악에서도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위음악의 방향에 대해 바른 관망을 할 수 있는 폭 넓은 교양인이 되어야할 것이 아닌가?

 < 1970. 5. 11. 연세춘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