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교회음악의 세속화와 현대화

나  운  영

   1967년 기독교 사상지에 나는 「한국 교회음악의 현대화 과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교황 바오로 6세가 3월 7일 발표한 로마 카톨릭 성가에 대한 개정령은 신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경박하고 난잡스럽고 경건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지향하는 점에 있어서도 극력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요즈음 우리는 합동찬송가 개편에 있어서 부흥가, 복음가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빼어 버리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이 때에 카톨릭에서 비트리듬이나 째즈를 받아들인다면 신교도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 틀림 없으므로 더욱 엄중한 경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첫째로 나는 교회음악의 현대화를 절대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엄숙하고 경건하고 숭고해야만 교회음악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 뿐이며 교회음악의 세속화로 말미암아 교회 자체가 세속화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교회음악을 구해 내야 할 때가 왔다.」 이상으로 교황의 성가 개정령이 한국 교회음악의 진로에 일대 지장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의 다른 점을 밝혔다.

   물론 음악이란 리듬, 멜로디, 화성, 음색,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까닭에 이것만으로는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을 구별 지을 수 없다.  다시 말한다면 교회음악에서 사용하는 리듬, 멜로디, 화성, 음색,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리듬이 복잡해도, 멜로디가 무조적이라도, 화성이 불협화음 투성이라도, 음색이 기괴하더라도, 형식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내용이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12음기법으로도 교회음악을 작곡할 수 있고, 전자음악이로도 얼마든지 교회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가운데서 <미사곡>이나 <시편에 의한 교향곡> 같은 것이 이미 고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 <트레니>, <홍수>, 칸타타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롯하여 스톡하우젠의 전자음악 <소년의 노래>,  펜테레키의 <누가 수난악> 등등이 소위 전위적인 수법을 구사한 휼륭한 교회음악이라는 것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따라서 고풍찬연한 것이 교회음악이 아니요 소위 찬송가 스타일로 된 것―좀 더 심하게 말해서 주로 3화음으로 작곡된 것만이 교회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물론 작품 자체를 놓고 생각해 볼 때 그 스타일과 기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에 이것이 문제된다고 하면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헨델의 <메시아>를 도저히 따를 수 없고,  멘델스존의 <엘리야>는 바하의 <B단조 미사곡>을 도저히 따를 수 없을 것이며,  쉔베르그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은 스톡하우젠의 <소년의 노래>를 도저히 따를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전고전음악, 고전음악, 낭만음악, 근대음악, 현대음악은 모두 영원히 공존한다, 다시 말해서 전고전적 양식이나 고전적 양식으로 된 것만이 교회음악이 아니며 현대적 양식―그 중에서도 특히 전위적(前衛的)수법으로도 얼마든지 교회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교회음악이 아니므로 앞으로 얼마든지 현대인의 생리에 맞는 교회음악이 작곡되어야 할 것이다.

   1958년 역시 기독교사상지에 나는 「한국 교회음악의 진로」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민족성과 시대성을 떠난 작품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품이라 할 수 없으며 또한 이 민족성과 시대성이 희박한 작품이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없는 것임은 하나의 상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성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고 더욱이 이를 무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중략)  하기야 한국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작품을 써야 된다는데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의 주변에는 스스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이를 반대하는 편에 서 있는 절대다수의 비전문적인 작곡가(?)가 많은 것만은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첫째로 작곡기법이 미숙한 탓과 둘째로 그 미숙한 점을 합리화시키려 드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략)  독일의 현대작곡가 스톡하우젠은 다니엘서 3장의 가사로 <소년의 노래>라는 전자음악을 작곡하고 있는 이 때에 이 현대적 작곡기법에 의하여 작곡된 작품은 종교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나 민요풍으로 쓴 작품은 경건하지 못하다고 단정하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이상으로 우리는 「한국적 아이디어와 현대적 스타일이 결부된 작품」을 써야 되겠다는 나의 주장이 분명히 표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국 교회음악은 먼저 한국적이어야 하고 다음으로 현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편집자가 요구하는 「세계적인 교회음악의 추세와 특히 젊은이들의 전위음악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과 적응시킨다면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겠다.
   첫째로 외국에서는 토착화된―그러면서도 현대인의 감각에 잘 맞는 교회음악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령L.Schifrin의 <Jazz Mass>, D. Brubeck의 Oratorio <The Lighting The Wilderness>, Penderecki의 <누가 수난악> 등은 그 좋은 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방언(方言)아닌 방언(邦言)으로 훌륭한 교회음악을 작곡했고 이것을 통해 국제 문화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남의 나라의 것을 받아들이지만 말고―실은 낡은 찬송가 이외는 별로 받아들일 것도 없지만―한국적인 작품을 외국에 수출하여 교환함으로써 주안에서 온 세계가 하나인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볼 때 세계 합창대회 때에 연세대 합창단이 연주한 필자의 작품인 <부활절 칸타타>와 <시편 23편>이 미국 Pleasant Music Publishing Corp의 요청에 의해 출판키로 된 것은 비단 나 한 사람만의 광영이 아니고 이것이 곧 세계적인 교회음악의 추세를 말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라 하겠다.
   둘째로 젊은이들이 전위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전자음악, 구체음악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째즈, 비틀즈 음악, 행동음악, 反음악 같은 것을 두고 하는 말로 해석되는데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것은 교회음악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단호히 저지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종의 「해프닝 쇼」에 속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이런 것은  음악(音樂)이 아니요 음악(淫樂)이며, 성가(聖歌)가 아니라 성가(性歌)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연주되는 음악 가운데에는 Church Music과 Music In Church가 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Church Music도 Music In Church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교회 밖의 음악」이요 세속음악이요, 속세음악이다.
   교회에서 한 발자국만 나가도 싫도록―아니 죽도록 들을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에서 구태여 교회 안에까지 음악(淫樂)과 성가(性歌)를 끌어들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교회와 사회가 다른 점이 없지 않은가? 교회음악이 아무리 현대화된다 하더라도 세속화되어서는 안 될 말이다.
   따라서 앞으로 젊은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현대적 감각의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해서 부르게 된다면 「교회음악의 세속화」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며 이런 현대적 감각에 의한 교회음악을 듣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새로운 신도의 수가 날로날로 증가될 것으로 믿어진다.

 < 1969. 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