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회춘기에 접어든 나

나  운  영

   여성의 경우는 잘 몰라도 목소리가 변한다든가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다든가 이성을 만나기만 해도 웬일인지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울렁거리는 등 - 이러한 증상을 가리켜 소위 사춘기라고 하는 모양인데 어쨌든 이러한 제목으로 글을 쓰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니 웬일일까?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전교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단발머리 소녀가 있었다. 나도 남자 중에서는 제일 노래를 잘 불렀기 때문에 학예회 때마다 각각 독창을 자주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소녀와는 한 번도 이야기를 해 보지 못했던 터이지만 어쩌다 무심코 지나가다가 서로 거리가 가까워지면 짓궂은 친구들이 우리 둘을 놀려 주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그 소녀에 대해서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되어 길을 가다가도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웬일인지 부끄러워 도망을 치면서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은근히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용기를 내어 몰래 그녀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저 그녀의 집을 알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듯' 그녀가 골목길로 사라져 버렸을 때 나는 그저 막연히 그녀의 집 골목을 확인했을 뿐 더 쫓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곧장 되돌아와 버렸다. 지금도 어렴풋이나마 그 단발머리 소녀의 얼굴과 그 골목길이 머리에 떠오를 뿐 그녀가 지금 어디서 누구하고 어떻게 사는지조차 모르지만 어쨌든 이것이 나의 사춘기가 아니었던가 생각하면 다시 한번 부끄러워지고 싶은 심정이 된다.
   따져보면 사춘기란 사랑을 느끼기 이전의 하나의 생리적 변화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즉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막연히 이성을 동경하게 되는 것이니 그 순수한 감정을 우리는 귀엽게 보아야 할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요즈음 10대 소년 소녀들 중에 왕왕 탈선을 하는 예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올바른 성교육이 거의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서 사춘기란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은 찾아오는 것이니 이 생리적 변화과정을 순조롭게 밟아 나가야만 비로소 성숙한 청춘 남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소년 시절의 일을 귀중한 추억으로 오래오래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중학 시절의 일이다. 편모슬하에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나는 소위 활동사진이나 소설책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허락하는 활동사진도 되도록 안 보고 자랐으니 이성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후 일본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화 '죄와  벌'과 소설책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보았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음악 전문서점에서 산 것이기 때문에 명곡해설 책인 줄로만 알고 샀던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생전 처음으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니 암만해도 이상하기만 했다. 나 자신이 점점 죄악의 구렁텅이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이 악서(惡書)를 끝까지 읽어야 할까? 그러나 떨리는 마음과 호기심으로 끝까지 읽고 나니 그 충격은 좀처럼 가셔지지가 않았다. 그 뒤로는 한 반의 여학생을 만나도 웬일인지 다시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울렁거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이것도 사춘기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나는 이런 경험을 종합해 볼 때 사춘기에 올바른 성교육을 받지 못하면 탈선하기가 쉽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며, 특히 나의 경우에 있어서 탈선하지 못하도록 나를 지켜 주신 하나님께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이처럼 사춘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문득 '회춘기'란 말이 머리를 스쳐 간다. 도대체 회춘기란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나 내 나름대로 '제2의 사춘기가 다시 돌아오는 시기'란 뜻으로, 혹은 '사춘기를 회상하는 시기'란 뜻으로 해석하고 싶으니 어쨌든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 어쩐지 벌써 늙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인생 40이면 갱년기에 접어 들어선 것 뿐이니 앞으로도 마음껏 로맨틱한 작품을 써야겠다. 낭만적인 작품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참으로 낙망적(落望的)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1968.3. 경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