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독서와 작곡과 저술과 

나  운  영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책을 사 모으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전차 회수권 살 돈으로 몽땅 헌 책을 사고 그 대신 꼬박 걸어 다녀 5년 간을 개근했다.  아마 골동 수집가로도 이름 있었던 부친의 유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모으던 버릇이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년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줄곧 계속되고 있다. 8.15 해방 전까지는 주로 헌 책을 사 모았지만 그 뒤로는 신간서적을 외국에서 사 들여오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 가 있는 선배,동료 또는 후배들이 큰 봉변을 겪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나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책을 사 보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이렇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주로 무상으로 받은 책을 소화시켜 교향곡,교성곡,실내악곡 등을 작곡하여 발표하는 한편 역서조차 없는 - 대위법,음악형식론,작곡법 등 한국 유일의 전문서적을 출판하고 또 이것으로 후학을 지도해 오고 있다.
   어느 때부터의 습성인진 모르나 나는 책을 읽을 때에는 일단 의심을 품으면서 읽는다. 그러므로 항상 비판적인 눈으로 다른 여러 학설과 비교해 본 뒤에서야 나의 태도를 결정 짓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책을 읽는 까닭에 가령 화성학이면 화성학에 관한 책을 될 수 있는 데까지 모조리 사 모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상당히 많은 양서를 모았고 이를 되풀이하여 정독하고 있다. 일찍이 일본 이외에는 나가본 일이 없는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외국 신간서적,관현악 총보,현대음악 레코드를 사 모으고 있다. 그래서인지 국내에서는 나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이나 레코드가 많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외국에 가 있는 학생들보다 먼저 이런 것들을 구해서 공부하는 때가 종종 있다.
   나는 독서,작곡,저술의 3중대위법의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다. 토끼 두 마리를 쫓다가는 두 마리 다 놓치고 만다고 하지만 나는 세 마리를 한꺼번에 쫓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까지 이런 방법으로 해서 별로 손해를 본 일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금도 권태를 모르고 능률적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작곡을 하다가 막혔을 때 독서를 하면 작곡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독서를 하다가 피곤을 느끼게 되면 책을 쓰기 시작한다. 만약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 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시 작곡을 한다. 이렇게 해서 독서,작곡,저술이 계속되므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작곡도 완성되고,저서도 나오게 된다. 비록 게으른 나이기는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래도 작곡활동과 출판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나 자신이 잘났다고 느껴본 일이 없다. 그렇지만 또 한 번도 나 자신이 못났다고 느껴본 일도 없다. '천재는 없다'라는 말을 나는 믿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IQ테스트 같은 것은 무용지물이다. 다만 초지일관 묵묵히 정진하는 것만이 나의 생활신조이다. 나는 나의 직업과 나의 연구를 의식적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루를 3등분하여 8시간은 직장에 바치고,8시간은 독서,작곡,저술 등 연구에 바치고, 남은 8시간은 수면,휴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이 규칙적 생활이 유지되도록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 어느덧 40고개를 넘고 보니 다소 초조를 느끼게 된다. 나의 예술적 감각이 무디어지기 전에 부지런히 작곡도 해야겠고, 후학을 위해서 저서도 남겨야겠다.
   나는 '한국적 아이디어+현대적 스타일' 즉 민족적인데 뿌리가 깊이 박힌 현대적 작품을 써야 된다는 것을 항상 고집한다. 누가 들어도 20세기 후반기의 한국 사람의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써야 되겠다. Poor Western style의 것, 즉 한낱 서양 것의 모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므로 시대조류에 민감하면서도 내 나라의 것, 내 것을 작품에 반영시키기 위하여 고심한다. 뿐만 아니라 음악 이전 또는 기법 이전의 작품이 되지 않도록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작곡을 하는데 있어서 나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하여 특히 금일개업 다방의 출입이 빈번하다. 그러므로 다방조합장이란 명예스러운 별명까지 가지게 되었다. 나는 작곡을 착수하기에 앞서 반드시 창작메모를 세밀하게 작성하는데, 이런 것은 주로 다방,거리,버스 등 비교적 소란한 곳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따라서 작품구성만 끝나면 교향곡이라도 3주일 내외면 완성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그러나 허송세월로 말미암아 예술은 짧고 인생이 길어서는 안될 말이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겠다. 하루바삐 서양음악 이론을 한국적으로 섭취한 다음 한국적 작곡기법의 체계를 세워야겠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성를 띤 한국음악을 창조해야겠다. 그러함으로서 잠시 세상에 왔다 간 뚜렷한 흔적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닌가? 남들이 하는 일에 간섭하거나 누구를 시기.질투할 마음의 여유도 없다. 그저 부지런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나의 길을 홀로 걸어갈 따름이다. 온갖 정력과 정열을 오로지 독서와 작곡과 저술에 쏟아야겠다.

<1965.8.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