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민족의 노래
 ―봉선화와 홍난파 선생―

나  운  영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한국사람이면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봉선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파 홍영후 선생은 우리나라 양악계의 대선구자인 동시에 민족음악 건설의 공로자요 은인이다.  선생은 29세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고,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음악잡지 「음악계」를 발간하였고,  41세 때에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여 모짜르트의 <쥬피터 심포니>를 초연하였다.  선생은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음악 사업가, 음악 교육가, 음악 평론가인 동시에 창작소설, 번역소설, 역가(譯歌), 작가(作歌) 등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특히 작곡가로서의 선생의 업적을 더듬어 보면 <관현악 조곡>(즉흥곡, 小론도, 동양풍 舞曲), <관현악부 독창 組曲>(나그네의 마음)을 비롯하여 바이올린 독주곡 <하야(夏夜)의 성군(星群)>, <동양풍 무곡> , <애수(哀愁)의 조선>, <로맨스>, 「조선가요 작곡집」, 「조선동요 백곡집」등 주옥 같은 작품을 남기었다.
  그러면 민족의 노래 <봉선화>는 과연 어느 때에 어떤 동기로 지은 곡일까?

   <봉선화>의 작사가인 김형준 선생은 홍선생과는 사돈간이 된다.  즉 홍선생의 조카인 홍성유(바이올리니스트)님의 부인인 김원복(피아니스트)님의 춘부장이 바로 김선생이시다.  김인식, 이상준 선생과 함께 양악 수입기에 있어서의 3대 공로자의 한 분인 김형준 선생과 이와 같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우선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선생이 이 곡을 작곡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15년간 같은 학교에서 일을 보신 독고선 선생 말씀에 의하면 3.1운동 직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복교하려다 거절당한 후 귀국하여 비분에 넘친 심정으로 이 곡을 작곡하였다고 한다.  즉 선생은 1915년 3월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바이올린과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 같은 전습소의 교사로 있다가 1918년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으로 말미암아 일단 귀국하였다가 복교하려던 것이 거절당한 모양이다.  이리하여 1922년 9월에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925년 4월에 음악잡지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였고,  동  9월에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여는 등 눈부신 활동을 하다가 1926년에 다시 일본으로, 1931년 6월에는 미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어느 해에 <봉선화>를 작곡하였는가 하면 1921년이 틀림 없다.  왜냐하면 선생의 「제1 창작집」(處女魂) 유고(遺稿)의 첫 페이지에 이 <봉선화>의 반주악보가 '애수'라는 제목으로 실려져 있는데 가사는 빠져있으나 1921년 작으로 명기되어있다. 따라서 독고선 선생의 말씀과 일치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첨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조선동요 백곡집」은 1929년에 출판되었고,  「조선가요작곡집」은 1933년에 출판되었으니 이러한 곡들보다 훨씬 전에 작곡된―말하자면 노래로서는 <봉선화>가 처녀작(?)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곡이 또한 선생의 대표작인 동시에 「민족의 노래」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매우 의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가곡이란 먼저 가사가 좋아야 하는데 사돈이자 음악계의 선배인 김형준선생의 가사는 일제하에 신음하는 우리 민족의 쓰라림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며 선생의 마음을 찔러 선생으로 하여금 심혈을 기울여 작곡을 하게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북풍한설 찬 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 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봉선화>는 가사는 물론 곡도 대단히 잘 되었다고 본다. 애처로우면서도 용기를 북돋아 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곡이다. 일제는 이 곡의 가사가 너무도 민족적이라 하여 마침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노래를 사실상 애국가처럼 몰래 숨어서 불렀던 것이다.
    민족의 노래 <봉선화>가 국내에서는 이처럼 절대로 부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인데 8·15전에 소프라노 김천애 여사가 일본 동경에서 음악학교 졸업연주회 때에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감연히 나타나 <봉선화>를 독창함으로써 거기에 모인 일본 사람은 물론 한국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준 이래 해방 후 다시 김여사에 의해 널리 불려 이제는 김여사를 보면 <봉선화>가 연상되고 <봉선화>를 부를 때마다 김여사를 연상케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봉선화>와 김여사는―마치 김형준 선생과 홍선생과의 경우와 같이―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봉선화>야 말로 우리 가슴 깊이 사무쳐 「민족의 노래」로서 영원토록 남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끝으로 「굴욕외교반대(屈辱外交反對)」를 부르짖고 있는 이 현실에서 <봉선화>를 다시 불러 볼 때마다 8·15 전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금할 수 없다.

 < 1965. 8. 思想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