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와 예술을 떠난 현실참여

나  운  영

   얀.파데레프스키는 1860년 11월 6일 폴란드의 쿠릴로프카에서 태어나 3살 적부터 피아노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1878년 바르샤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이 음악원의 피아노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881년 이후 베를린에서 작곡을 공부했으나 1884년부터 87년까지 비엔나에서 세계 최대의 피아노 교육가인 레세티쯔키에게 사사(師事)하게 된 후부터 피아니스트로 예술을 전공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1888년 파리에서 최초의 독주회를 열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1909년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에 취임하는 한편 제1차 세계대전까지 문자 그대로 피아노계의 왕자로서 유럽과 미국에서 빛나는 연주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조국의 작곡가 쇼팽의 연주가로서 유례가 없는 독자적 경지를 개척하여 마침내 그의 쇼팽 해석은 새로운 하나의 전통이 되어 버렸다. 1913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주회를 빈번히 가져 그 공로로 말미암아 1918년에는 주미(駐美) 폴란드 외교관 대표가 되었으며 이때로부터 그는 정치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국이 외적에게 짓밟히자 피아노의 열쇠를 잠가 버리고 그 사랑하던 음악예술이 끝났다고 절규하였다.
    1919년 종전(終戰)과 함께 폴란드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음악계를 떠나 오직 조국애에 불타는 정치참여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0년에는 다시 정계를 떠나 피아니스트로서 전쟁 희생자를 돕기 위하여 유럽과 미국의 무대에 나타났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군대가 폴란드에 침입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또다시 대통령으로 추대되었으나 고령(高齡)으로 구휼(救恤)연주여행을 계속하던 중 1941년 6월 29일 급성폐염으로 82세의 생애를 뉴욕에서 끝마쳤다.―이상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파데레프스키의 약력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가 여기서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 어떻게 투쟁하였으며 조국애를 어떻게 발휘했는가 하는 점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이 있다. 나라야 어찌 되든 상아탑만 지키려 드는 족속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배경」이 없는 예술은 국경을 넘기에도 힘이 든다. 이것은 홍난파선생이 남긴 말이다. 나라 없는 민족문화를 자랑해 무엇하랴? 먼저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고 다음에 문화를 운위(云謂)해야 할 것이 아닌가?
   「예술인의 현실참여」란 말이 논의되고 있는 이때에 아직도 우리네들 중에 예술인의 현실참여를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분명히 시대도착(時代倒錯)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우리들 음악인 중에는 입으로만 민족음악 창조를 부르짖고 있을 뿐 사실상 서양음악만을 숭상하고 이를 수입, 섭취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들이 허다하다. 무릇 민족음악이란 우리의 고유음악인 국악을 토대로 하고 이에 외래음악을 섭취해야만 세계성을 띤 민족음악으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인데 내 나라의 음악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이 외국음악만을 흉내 내고 있는 실정이니 그런 자들에게는 민족도, 국가도, 문화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며 더욱이 민족음악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 외래음악을 왜 섭취해야 하며 또한 외래음악 중 「무엇을, 어떻게」 섭취해야 하느냐에 대해 분별조차 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려고만 하니 현실참여란 말이 해당도 되지 않을지 모를 일이다.
   나는 우리 음악인이 「음악을 통한 현실참여」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극력 주장한다. 연주가는 연주를 통해서, 작곡가는 작곡을 통해서 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파데레프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 중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주활동을 한 것이나 전쟁 희생자를 돕기 위해 연주여행을 한 것이나 구휼 연주여행을 감행한 것과 같고 또한 핀란드의 세계적 대작곡가인 시벨리우스가 교향시곡 <핀란디아>를 작곡하여 조국의 혼을 불러 일으킨 것이나 우리 안익태선생이 교향시곡 <한국 환상곡>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에서까지 우리 말로 연주한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예술인의 현실참여」라고 하면 예술을 떠난 행위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은 듯하나 이것은 전쟁이나 혁명 등 국가 초비상사태에 빠졌을 때에 국한된 일이므로 마치 파데레프스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분연히 피아노 뚜껑을 닫아 버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대통령의 중책을 맡은 것과 같은 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네들 중에는 자기의 전공을 이탈했거나 졸업(?)해 버린 자들로서 예술계의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하여 심지어는 예술인으로서의 명맥이나마 이어 볼까 하는 심산에서 국가 초비상사태가 아닌 때에 부단히 「예술을 떠난 현실참여」를 꾀하고 있는 자가 있음을 볼 때 측은한 감을 금할 수 없다.
   「현실도피와 현실참여」 이 두 가지 말을 가지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파데레프스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현실도피야말로 비애국적인 사상으로 단정할 수 있으나 한편 「예술을 떠난 현실참여」도 우리는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만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라 없는 문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폴란드와 우리나라―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는 우리로서는 민족음악 창조를 위해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한 음악가 파데레프스키를 본받아야 할 것은 물론 국가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나라를 도로 찾기 위해 기꺼이 「예술을 떠난 현실참여」에 앞장섰던 정치인 파데레프스키의 뒤를 따를 각오가 필요하다. 현실도피의 그릇된 사상을 버리고 오직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는 것만이 우국(憂國), 애국(愛國), 구국(救國)의 길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 1966. 1. 사상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