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애국자 안익태 선생
 ―그의 2주기에 부쳐―

나  운  영

   국제인, 이방인이었던 안익태 선생에게는 적이 많았다. 국내 사정에 어두웠던 탓과 개성적인 예술가가 지니기 쉬운 특이한 성격 때문에 국내 음악인들의 협조를 그리 얻지 못하여 많은 고민을 겪었으나 그는 굳은 결심을 굽히지 않고 제2,3회 국제음악제를 단독으로 강행했으니 이러한 일은 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세계적 교향악 지휘자였다. 베토벤의 <제9 교향곡―합창>의 제4악장의 연주를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거장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와 포르테시모(매우 세게)의 구별을 이처럼 뚜렸하게 요구하는 지휘자를 일찌기 나는 보지 못하였으며 악곡 형식에 따라 서주(序奏), 주제(主題), 클라이막스, 종결(終結) 등을 누가 들어도 느낄 수 있도록 명확하게 연주함으로써 청중을 매혹시키는 ... 이처럼 열정적인 동시에 정열적인 지휘자를 또한 일찌기 보지 못하였다. 확실히 마력(魔力)을 가진 지휘자였다.

   그는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연주할 때보다도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때에 그 실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더욱이 그의 대표작인 교향적 환상곡 <코리아>의 연주를 들으면 그가 예술가라기보다 열렬한 애국자인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즉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에게도 우리말 가사로 애국가를 부르게 했으니 그야말로 음악을 통해 조국을 빛낸 순회대사(巡廻大使)였음이 분명하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성경 말씀대로 그는 우리 악계에서는 환영은 커녕 제대로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말 없이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나 이역 병상에 누워 조국 산천, 형제 자매들에의 향수(鄕愁)를 달래기 위해 자신이 국제음악제 때 지휘 녹음했던 레코드를 들으며 고요히 숨지셨다 하니 가슴이 떨린다.

< 1967. 1. 6 경향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