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2 '독백과 대화'
 

 잊을 수 없는 사람

나  운  영

   우리 음악계에 있어서 이미 고인이 되신 많은 선배들 가운데서 내가 첫째로 손꼽을 수 있는 분은 홍난파선생이다. 나는 선생의 바이올린 독주를 여러 차례 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선생은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현악 작곡가요, 관현악 지휘자였다. 즉 선생의 작품인 <관현악 조곡>을 친히 지휘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머리에 떠오른다. 나는 선생의 열정적인 지휘에 매혹되어 나도 이 다음에 저렇게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 보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이렇게 존경하고 사모하던 선생을 찾아 뵌 것은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2, 3년 전이었을 것이다. 그때 선생께서는 나를 칭찬해 주시고 부디 훌륭한 작곡가가 되어 달라고 격려해 주셨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분은 채동선 선생이다. 나는 8.15해방 직전 선생께서 조직하신 현악4중주단의 첼로를 맡아 한 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연습을 했었는데 이때에 선생 밑에서 아카데믹한 음악연주를 익힐 수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정계에 투신하여 좌익(左翼)과 싸우셨고 6.25전란 후 부산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병상을 찾아간 나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 주셨다. 나는 지금도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분주하게 걸어 다니시던 선생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 밖에도 김인식 선생,  안익태 선생 등 여러분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으니 그는 김인수 선생이다.


김인수 선생
    선생은 키가 크고 곱슬머리에다가 코가 비교적 큰 편이어서 누가 보아도 서양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의 특이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만년에는 속칭 「사자 머리」의 흰 머리를 날리며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소위 사꾸라 단장을 들고 학교나 거리를 다니시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의 풍채에 누구나 위압을 느꼈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선생은 성미가 급하시기  때문에 가끔 첼리스트 아닌 테러리스트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과 오랜 사귄 사람들은 그가 천진난만하고 정의감에 불탄 분이어서 악을 보고 절대로 참지 못하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선생은 1903년 원산 태생으로서 성가대의 제1테너를 맡았었고 바이올린을 공부하기도 했으나 청년시절에 악기점을 경영하는 한편 첼로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그 당시 토요일마다 원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첼로 레슨을 받았다고 하니 그의 열성, 집념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서 활약하다가 만주 「하르빈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유일한 동양인으로서 더욱이 첼로 차석(次席)을 차지하여 활약했던 빛나는 경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그를 단지 호주가(豪酒家), 테러리스트로만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선생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하르빈 교향악단이 서울에서 연주했을 때였다. 백계(白系)러시아 사람들로만 구성된 멤버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인 우리나라 사람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 분을 높게 우러러 보았던 것이다. 물론 8.15 해방 전이었으니까 비록 우리가 나라는 없어도 우리 민족을 빛내는 분이 바로 선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감격도 잊을 수 없는 일이나 그보다도 몇 배 더 나의 인상에 남는 것은 선생께서 하르빈 교향악단을 그만두시고 귀국하신 직후의 이야기이다.
    즉 채동선 선생과 현악4중주의 연습이 끝난 뒤에 나는 하르빈 교향악단의 연주를 들었을 때의 감격을 간직한 채 선생 댁을 방문했었다. 마침 선생은 돈암동에 집을 마련하고 미처 짐을 풀지도 못하고 계실 때였으나 예고 없이 찾아간 낯모를 어린 후배를 영접해 주시고 음악 이야기를 들려 주셨던 것이다. 특히 브람스 작곡의 <피아노 3중주곡>의 레코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들려 주시면서 감격어린 설명을 해 주셨던 것이다. 어찌도 열심히 해설을 해 주셨던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완전히 도취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당시에 마포 종점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갈 것이 걱정되었다. 이미 전차도 끊어졌으니 돈암동에서 마포 종점까지 걸어가야만 했고 더욱이 첼로를 갖고 방문했던 터라 무거운 첼로를 메고 걸어가야만 했으니 그 고생이란 보통이 아니었음을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 사정은 전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레코드를 또다시 들려 주시면서 실내악의 진수(眞髓)를 나에게 느끼게 해 주려고 열을 올리시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캄캄한 밤중에 첼로를 메고 혼자서 걸어오는 동안 나는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마냥 선생의 말씀을 되씹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따금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서 선생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음악가요, 교향곡은 물론 특히 실내악의 진미를 아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음악에 사는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뒤로 선생은 하르빈 다방, 신세계 다방, 산장, 신세계 음악감상실 등을 경영하셨을 뿐만 아니라 대동아악단을 조직하기도 했고 재정난에 허덕이던 고려교향악단을 인계받아 가재(家財)를 털어 3, 4개월 직접 운영하시기도 했고 대한교향악단을 조직하여 <비창 교향곡>, <신세계 교향곡> 등을 지휘하여 슬라브 음악의 권위자로서의 관록을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선생은 한때 이화여대를 비롯하여 숙명여대, 서라벌예대에서 교편을 잡으신 일이 있었는데 특히 이화여대에서는 첼로는 물론 음악사까지 맡아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등 소위 슬라브 음악에 중점을 두어 독특한 강의를 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나도 이대에서 선생을 모시고 있었던 관계로 선생과의 교분이 더욱 더 두터워졌던 것이다.
    선생은 슬라브 음악은 독일의 음악과 달라서 일정한 템포로 연주하지 말고 소위 템포 루바토(점점 느리게 연주했다가 다시 점점 빠르게 연주하는 것 또는 이의 반대)로 연주해야만 맛이 난다는 것과 우리 민족음악은 민요에서 소재를 발굴해서 이것을 예술화해야 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셨던 것이다.

    선생께서 이화여대 강의를 그만두신 후에도 나는 가끔 명동에 있는 동방문화회관 안의 목동 다방에서 선생을 뵈었는데 그는 언제나 지정석에 자리잡고 파이프담배를 피우시면서 후배들과 담소하시다가도 라디오나 레코드에서 명곡이 흘러나오면 숨을 죽이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그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하셨던 것을 누구나 목격할 수 있었으니 이 하나만으로도 선생의―음악에 대한 무서운 집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 가운데 악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정한 음악가라면 악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선생이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흔히 선생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까닭은 웬일일까? 이것은 그를 가까이 대해 보지 못한 때문이요 그의 가르침을 받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만년에 많은 감투를 썼다. 음악단체연합회 최고위원, 한국연주가협회 위원장, 문총(文總) 최고위원, 일본음악학교 동창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악단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했다. 그러나 그의 공직(公職)은 적어도 수입면에서 볼 때 완전히 공직(空職)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애주가에서부터 점차 호주가, 폭주가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정서를 움켜쥐고 시장(市長)을 만나러 다녔으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는 식사 대신 음사(飮事)를 즐기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명동 거리에서 술에 취한 선생의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친구들과 언쟁을 벌이다가도 나를 만나면 태도가 돌변하여 다정하고 양순한 그의 본성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술을 안했던 탓으로 나는 선생과 술집에서 어울리는 일이 한번도 없었으나 어느 술친구보다도 그는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나는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 드디어 선생은 1959년 2월 13일 58세를 일기로 고독과 실의와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파란 많은 인생의 막을 스스로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이 가신 뒤에 명동(明洞)은 그야말로 암동(暗洞)이 되어 버린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혼은 언제나 명동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줄 믿습니다.」
   이것은 그의 1주기에 그의 술친구이기도 했던 이봉구씨의 추도사이다. 즉 그의 1주기를 한 주일 앞두고 나는 추도회가 추진되고 있을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아무도 앞장서는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한 나머지 4, 5일을 앞두고 내가 앞장을 서서 추도회를 준비했던 것이다. 추도회는 생전에 선생께서 늘 출입하시던 목동다방에서 열렸다. 우리는 선생이 늘 앉으시던 지정석에 사진을 모셔 놓고 선생이 가장 즐기시던 <비창 교향곡>을 들으면서 엄숙하게 진행시켰다. 「김인수는 굶어서 돌아갔습니다.」라는 추도사를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었다. 여러 사람들의 추도사에 이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선생의 추도회에 있어서 발기인 대표가 될 자격이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차마 그저 보낼 수 없어 부랴부랴 서두른 것뿐입니다. 하지만 이 회를 주도하게 된 것을 나는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선생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다면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
   선생은 첫째 강직한 성격으로 시비를 철저하게 가리는 장점의 소유자요 열정가였다. 불의와는 절대로 타협할 줄 몰랐기 때문에 종종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악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희생정신에서 나온 언동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둘째로 선생은 천진난만한―악의가 조금도 없는 분으로서 죽도록 음악을 사랑한 분이었다. 원산에서 서울까지 한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레슨을 받으러 다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음악에 정열을 쏟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선생은 슬라브 음악의 권위자였다. 물론 여러가지 여건 때문에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해 일반적으로는 그리 인정을 받지 못하고 만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의 실력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차원이 높은 것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것은 그가 하르빈 교향악단에서 백계 러시아 사람들과 오랫동안 연주생활을 한 데서 얻은 귀중한 경험의 소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교향악 지휘에 있어서 외국 대가들의 도가 통한 지휘법, 고급 지휘법을 흉내 냈었기 때문에 도리어 혼란이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주로 박자만을 맞추기에 급급한 당시의 연주에 있어서 그의 영적(靈的)인 지휘는 뜻 있는 사람들의 공감을 샀던 것이다.
   넷째로 그는 육체적인 영양실조보다는 정신적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고민했던 것이다. 즉 그가 악단(樂壇)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해 분통이 터져 죽은 것이다. 교향악 운동에 몸을 바치려 했으나 아무도 그를 경제적으로 도와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특이한 성격조차 몰라 주는 음악계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고군분투(孤軍奮鬪)하다가 쓰러지고 만 것이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선생이 가신 뒤의 명동(明洞)은 그야말로 「암동(暗洞)」이 된 느낌이 있다. 그러나 그의 혼은 오늘도 우리들과 함께 명동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기인(奇人)으로까지 알려졌던 첼리스트 겸 교향악 지휘자 김인수 선생을 나는 오늘도 잊을 수 없다. 음악의 얼을 내 마음 깊이 심어 주고 가신 선생을 사모하면서 선생의 명복을 거듭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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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수선생의 이름에 관해서는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즉 그가 하르빈 교향악단에서 백계 러시아 사람들 틈에 끼어 활동할 때 만주국의 압력을 받아 창씨(創氏)를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기시모도 징」(岸本 仁)이란 이름으로 바꾸게 된 것이다. 그런데 본래 그의 외모부터가 누가 보나 러시아사람 같아서인지 동료들 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시모프스키」란 별명이 붙게 된 모양인데 선생 자신도 「김인수」보다 「기시모프스키」로 불리워지는 것을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러시아 계통의 이름 중에는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 스트라빈스키 등등 「스키」로 끝나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동료들 간에서 「기시모프스키」라는 애칭(?)이 통용됐던 모양이다. 더욱이 슬라브 음악의 권위자로 자처(?)했던 선생 자신으로서도 이 별명은 매우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한편 우리들 간에는 「호랑이 영감」이라면 적어도 명동에서는 안 통하는 데가 없었다고 기억된다.


<1969. 4. 신동아 >


홍난파 선생
    1822년 4월 25세의 청년 작곡가 슈베르트는 52세의 대가인 베토벤을 처음으로 만나 그의 작품을 바쳤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비엔나에서 활약하던 이 두 사람은 가끔 같은 레스토랑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지마는 본래가 수줍은 성격의 슈베르트는 감히 자기 소개를 하고 만나 이야기를 걸 용기조차 없어 그저 멀리서 숭배하고만 지내던 것이 우연히도 처음으로 이 대선배를 만나서 그의 작품을 인정받게 되었으니 슈베르트의 기쁨은 그야말로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 아닌가? 그 뒤로 베토벤이 죽기 전에 슈베르트는 다시 두 차례나 그의 병상에 위문을 갔었고 장례식 때에는 횃불을 들고 앞장 섰던 것이다. 그는 이 대선배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했고 일년 뒤에 그를 뒤따라 갈 때에 내가 죽거든 나를 베토벤 옆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늘날 비엔나 중앙 묘지에는 이 두 악성이 나란히 묻혀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홍난파선생님과 나의 경우가 생각난다. 그러니까 193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곡 부문이 들어 있었는데 그때 뜻밖에도 나의 가곡 <가려나>가 당선됐다. 그런데 이 심사를 홍난파선생님이 맡으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때에 중앙고보를 갓 나온 홍안의 소년이었는데 당선이 된 뒤에 생전 처음으로 홍난파선생님 댁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그때에 선생님께서는 갓난애기를 안으시고 나와서 나를 맞아 주셨다. 방으로 안내된 나는 선생님에게서 격려의 말씀을 흡족히 듣고 작곡을 전공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결심했다. 그때의 선생님의 자상하시고 인자하신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치 자신의 후계자를 발견이나 하신 듯이 기뻐하시며―비록 나라는 없으나 작곡을 전공해서 민족의 이름을 빛내 달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것이 동기가 되서 오늘날 내가 이 길을 달리게 된 것을 생각하면 선생님의 크신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슈베르트의 전기를 읽을 때마다 홍난파선생님의 모습과 그 교훈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으며 그럴수록 나도 슈베르트를 본받아서 내가 죽거든 수원에 있는 홍난파선생님 옆에 나란히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선생님 옆에 묻히는 것이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 1969. DBS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