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교회음악이 우리 양악계에 미친 영향

나  운  영

   1885년 아펜셀라와 언더우드 두 선교사가 서울에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한 이래 찬송가가 보급되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창설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서양음악의 기초가 닦아졌다. 그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양악계를 5기로 나눈다면 다음과 같다.
       1. 수입기--- 1885~1910
       2. 태동기--- 1911~1919
       3. 요람기--- 1920~1929
       4. 정착기--- 1930~1945
       5. 성장기--- 1945~ 현재
   그런데 우리나라 양악계는 곧 우리나라 교회음악계를 의미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상준, 김인식, 김형준, 박태준 등 우리의 선배 음악인들이 모두 교회에서 양악을 배웠던 관계로 교회음악을 항상 주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음악이 우리 양악계에 미친 영향」이란 제목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여러 가지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교회마다  소위 「찬양대」(성가대)가 생겨 찬송가 또는 성가합창곡을 부르게 됨으로써 혼성 4부 합창을 하는 아마추어 합창대원과 이에 따르는 합창 지휘자와 오르간(피아노)반주자가 수 없이 배출되었고 뿐만 아니라 독창자, 독주자등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니 이들이 양악계에 미친 영향이란 너무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둘째로 찬송가와 성가합창곡을 통해 얻는 기본상식을 밑천으로 하여 동요, 창가, 서정소곡을 작곡하는 소위 작곡가가 나오게 되었으니 이것도 그 영향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셋째로 음악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이화여자 전문학교 음악과(현 이화여자 대학교 음악대학)가 생겼고,  한편 숭실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음악부에서 쟁쟁한 음악가가 속출되었으니 그 영향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상 세가지를 종합해 볼 때 합창지휘자, 피아니스트, 독창자,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음악교사 등 연주와 창작, 교육 -세 분야에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과거는 물론 현재도 우리 양악계를 지배하고 있고 또한 장래에도 지배할 것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하나의 상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문제 삼으려는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째로 우리나라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음악인이 별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교회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일급 음악인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음악인 가운데에는 교회에서 음악을 배워 출세를 한 뒤에 교회를 졸업해 버리는 자와 실력이 없어 사회적인 음악활동을 하지 못해 교회와 교회음악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안주하고 있는 자와 아마추어 성가대 지휘자, 반주자의 세가지 부류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통칭 교회음악인은 많으나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교회음악인이 별로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회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한심하다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한국 교계는 교회음악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부족한 탓으로 우수한 음악인을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즉 예배에 있어서 그 3분의 2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음악에 대하여 올바른 인식을 못하고 있어 성가대는 교회에 있어서의 하나의 「악세사리」또는 선전도구(?)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교회가 많은 까닭에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도 구태여 음악 전문가를 둘 필요를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따라서 옛날과 달리 요즈음은 성가대의 수준이 도리어 사회나 학교 합창단의 수준보다도 뒤떨어져만 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교회음악과 교회음악인에 관심이 없으니 새 사람을 양성하기는커녕 기성 음악인까지도 교회를 등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찬송가에 관한 문제인데 189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찬송가책이 출판된 이래 1967년에 비로소 우리 작품이 27편이나 섞인 「개편찬송가」가 나왔으나 실제로 널리 불리워지는 곡은 3, 4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작사, 작곡 자체는 물론이고 근본적으로 그 선정방법에 결함이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한국사람이 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모두 한국찬송가라고 단장할 것이 아니라 한국 냄새가 풍겨야만 한국찬송가라 할 수 있는 것인데 너무도 서양풍인 곡, 서양찬송가와 대동소이한 곡, 서양찬송가를 서투르게 흉내낸 곡, 기법이 미숙한 곡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즐겨 불리워질 까닭이 없지 않은가?
   넷째로 교회음악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생긴지 17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1955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교음악과가 연세대학교에 설치되었고 최근에 와서 이화여자대학교에도 그 설치를 보게된 것은 지극히 다행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관계로 아직까지도 찬송가나 가르치는 곳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 작곡과 성악과 기악과에 비해 우수한 입학지망자가 그리 많지 않은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는 실정이니 좀 더 오랜 시일이 경과되어야만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네가지를 종합해 볼 때 「교회음악이 양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 보다도 부정적인 면이 혹시 더 크지나 않나 하는 느낌이 앞서는 것을 숨길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교회음악계 그 자체가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본다면 교회음악이 양악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과대평가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아니냐 하는 반론이 나올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교회음악만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나는 우리나라의 교회음악계를 과소평가하려 드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아비판을 할 때가 왔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를 삼아보는 것이다.

   끝으로 교회음악이 양악계에 미친 영향으로서 아래와 같은 것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1967년에 열린 「기독교 예술 축전」에서 연합성가대에 의해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하이든 작곡)가 연주되었고,  영락교회 성가대에 의해 박재훈 작곡의  <시 150편>, <시130편>과 구두회 작곡의  <새 노래로 주께 찬양하라>,  <너의 눈을 높이 들어라>와 필자 작곡의  부활절 칸타타  중  <골고다의 언덕길>,  <시편 23편>(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이 발표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과연 이 작품들이 모두 한국적이거나 또는 현대적이었을까에 대해서는 논의할 여지가 많을 것이지만---.
   둘째로 1970년에 열린 「제2회 서울음악제」에서 김순애 작곡의 칸타타  <당신은 새벽에 나의 목소리를>이 연주된 것과 역시 같은 해에 「이동범 한국성가 독창회」에서 박재훈 작곡의  <복있는사람>(시편 1편), <고국을 떠난지 벌써 여러 해>,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내 의의 하나님이여>(시편 4편)과 김순애 작곡의  <주여 도우소서>, <아침기도>,  <풍랑에서>와 필자  작곡의 <피난처 있으니>(시편 46편),  <여호와여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편 130편),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시편 67편),  <한밤에 양을 치는 자>,  <주여 오소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편 23편)가 연주된 것은 한국성가의 방향을 제시한 하나의 귀중한 시도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오라토리오 합창단」이 8.15해방후 오늘날까지 매년 줄기차게 정기공연을 가짐으로써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 있으니 특기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 1972. 월간 신앙생활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