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
故 이인범 교수의 영전에

나  운  영

   우리나라의 명 테너요, 음악계의 거성인 이인범 선생은 이제 가시고 말았다. 이제부터 다시는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 가을의 적막감을 더욱 느끼게 하는구나.
   선생께서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에 이유선, 김성태, 김생려, 정희석 제씨와 함께 현재명박사의 지도아래 자라나 마침내 1939년 「전 일본음악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일본사람들을 물리치고 당당 수석으로 입상했으니 그의 실력은 이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선생은 참으로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으니 선생이 1941년 일본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942년부터 현제명박사가 주재하던 「경성후생 실내악단」의 주동멤버가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하면서 <가고파>, <내 마음>, <희망의 나라로>, <고향 생각>. <산들바람>등 우리 가곡과 수 많은 이태리 오페라의 아리아를 불렀을 때 선생의 인기는 김천애 씨와 함께 절정에 달했었으니 이제 선생이 떠나신 지금 메어지는 가슴은 더욱 아플 뿐---.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6·25사변 중에는 김생려, 김천애씨와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여전히 연주활동을 하시다가 1953년 얼굴에 불의의 중화상을 입어 선생의 치명상에 대해 동정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때 선생은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1956년에 「재기 독창회」를 가져 팬들의 기도와 성원에 보답했었으니 얼마나 훌륭하신 분이랴? 뿐 아니라 1960년부터 모교인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수 차례의 독창회와 오페라 주연, 레코드 취입등 눈부신 활동을 계속했으니 그야말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수명이 긴 연주가이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년 전부터 건강을 해쳐 오로지 음악대학 학장으로서 대학 오페라 운동에만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라 트라비아타>와 특히 우리나라 초연인 모차르트 작곡  <마적>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나 불행하게도  <마적>  초연의 날에는 참석조차 못하시고 병원 침대에서 병마와 싸우게 되었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돌아보건대 연세음악은 이 해로 55주년을 맞이하게 되며 1918년 김영환선생이 음악과 없는 음악부 교수로 취임했고, 1928년에 현제명박사가 이어받은 이후 박태준박사의 바톤을 다시 선생이 이어받아서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눈부신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니 선생의 공로와 업적은 이 하나만으로도 높이 찬양받을 만한 일이 어찌 아니랴?
   다만 음악대학 신축에 대한 꿈의 실현을 보지 못하시고 영면하셨으니 이 정신적 고민이 그의 건강을 더욱 해쳤던 것이나 아닐까?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성악가, 우리 음악계의 또 하나의 별을 우리는 잃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성경 말씀대로 후학들은 선생이 남기고 가신 뜻을 받들어 나아갈 것이니 선생이여 고이 잠드소서

 <1973. 9. 17 연세춘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