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사모님

나  운  영

   청년작곡가 로버트 슈만은 그의 스승의 따님 클라라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러나 스승은 사랑하는 딸, 미모의 천재 피아니스트를 일개 무명 작곡가에게 주고 싶지 않아 두 젊은이의 결합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그러자 슈만은 소송을 제기하여 4년만에 마침내 승소하여 소원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때 슈만은 30세요, 클라라는 21세였던 것이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한 그 해 130곡 이상을 작곡했으니 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클라라야말로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하는 말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 「시인의 사랑」 등 주옥과 같은 예술가곡이 모두 이때의 작품이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행복스러웠던 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리한 연습 때문에 손가락을 다쳐 영영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이 깨져 버린 후에 작곡가로 전향한 그는 예술가곡은 물론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피아노곡 「사육제」, 「어린이의 정경」, 「피아노 협주곡」등을 작곡할 때마다 클라라는 사랑과 정성으로 남편의 작품을 초연하여 세상에 알렸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도 행복스럽던 이 가정에 때아닌 검은 구름이 덮이기 시작했으니 이는 슈만에게 34세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정신병이었다. 문학청년이자 철학도였던 다감한 슈만은 44세 때 라인강에 몸을 던져 버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구조되어 2년간 정신병원에서 정양하다가 46세 때 사랑하는 클라라를 남겨두고 죽어 버리고 말았으니 클라라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음악사상 악처로 이름 높았던 사람 가운데에는 하이든의 아내와 모짜르트의 아내가 있다. 이와 반대로 양처로 이름 높았던 사람 가운데에는 바하의 후처와 슈만의 아내 클라라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야말로 클라라는 악처 아닌 양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함부르그의 촌놈(?)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브람스였다. 그는 양말도 신지 않고 구두를 신고 다녔던 사람이요, 수염도 깎지 않고 다니던 덥석부리였다고 한다. 이 시골청년이 슈만을 찾아갔을 때 슈만 부처는 그의 작품을 보고 높이 평가한 나머지 이 무명청년을 악계에 데뷔시켜 주었다. 이렇게 해서 브람스의 앞 길이 열리게 되었으니 슈만 부처의 은혜를 시골청년은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브람스는 진정으로 슈만을 자기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모셨던 것이다. 거의 한 집안 식구처럼 드나드는 동안에 슈만 가정의 불행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그때마다 그가 클라라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라인강에서 구조된 뒤로 정신착란이 계속되어 죽기 전 2년동안은 정신병원에서 거의 폐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어도 끝까지 정성된 간호를 하는 클라라에게서 브람스는 영원의 여인상을 발견했던 것이다.
  드디어 슈만은 세상을 떠났고 클라라는 미망인으로서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기만 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브람스는 클라라를 일방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했다. 선배이자 스승이요, 은인인 슈만의 아내 즉 사모님을 동정하던 마음이 어느 틈엔가 사랑으로 변질되고 말았으니---.
   물론 당시 브람스는 미혼이었다. 아니 그는 베토벤과 같이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에다 추남에다, 가난뱅이 신경질 늙은이었으니 결혼 상대자가 있을리 없어 결국 총각으로 일생을 마쳤지만 브람스는 사정이 매우 달랐었다. 즉 슈만이 죽었을 때 클라라는 35세요 브람스는 24세였다. 아직도 젊은 미모의 여인, 자기의 예술을 누구보다도 이해해 주는 명 피아니스트에 마음이 쏠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사모님이니 어찌 감히 구혼을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한편 정숙한 여인, 진실한 여성인 클라라인들 어찌 브람스의 청혼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이야기는 다시 되돌아가서 슈만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것을 알게 된 브람스는 곧 달려가 병자를 간호하고 클라라를 위로하는 한편 클라라가 연주하러 나간 사이에는 집을 지키며 클라라의 아이들의 동무가 되어 주기도 했다는데 이 때에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작품 9번)과 「담시곡」(작품10번)이 작곡되었다고 하며 몇 해 후에 다시 서로 만났을 때 슈만의 아이들을 위해 민요, 동요곡을 편곡하기도 했다고 하니 이 두 사람 사이는 참으로 음악을 통한 아름다운 교제였다.
   결국 브람스는 끝까지 클라라를 사모하면서도 독신으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정신적으로 사모님을 사랑했건만 그에게 있어서 클라라는 어디까지나 사모(師母)님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는 사모(思慕)님이기도 했던 것이다.
   브람스는 교향곡 보다는 주옥같은 실내악곡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클라리넷 5중주곡」은 가장 사랑스러운 음악이요,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해도 절대로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이 작품을 들을 때마다 클라라를 사모하는 노 총각의 순수한 사랑, 영원의 사랑을 직감하게 된다. 어쩌면 이 곡은 師母님 아닌 思慕님에게 바쳐진 사랑의 고백이요, 사모곡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브람스는 60세 때 체력과 창작력이 쇠퇴된 것을 스스로 느끼고 유서를 미리 써 놓았고 클라리넷에 대해 크게 매력을 느끼게 되어 그 해에 「클라리넷 5중주곡」과 「클라리넷 3중주곡」을 작곡했으며 63세 때에는 「클라리넷 소나타 제 1번과 제 2번」을 남기고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클라리넷 소나타」야말로 그의 백조의 노래라고 말할 수 있다.
   클라라는 브람스 보다 한 발 앞서 한 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브람스의 죽음을 재촉하지나 않았나 생각될 때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이노크 아덴」이 머리에 떠오른다.

 <1974. 3. 여성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