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사은회와 선생님 흉내

나  운  영

   나는 1939년에 중앙고보를 졸업했으니까 35년전의 이야기가 된다.
   그 당시 나는 걸어 다니면서 5년간 개근한 성실한 학생이었다. 전차 회수권 사라고 주는 돈으로 음악책을 다달이 사 모으면서 서대문 밖 천연동에서 측우소 고개를 넘어 중앙청 앞을 지나서 계동 막바지를 다녔던 것이다. 이렇게 학교 다니면서 사 모으기 시작한 책이 쌓이고 쌓여 결국 금년 4월에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도서관을 열게끔 되기도 했지만 하여튼 지금까지 줄곧 계속되는 나의 책난봉이 여러분과 같은 나이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선 말해둔다.

   중학 3년 때에 「아! 가을인가!」를 작곡했고, 이때부터 브라스 밴드에 들어가 트럼본, 큰 북을 만지다가 졸업반 때에 지휘를 했다. 그리하여 졸업생 환송음악회 때 나는 행진곡 「중앙」을 작곡, 지휘했다. 이 곡은 우리나라 최고 원로이신 김영환 선생님이 작곡하신 교가를 중간부분에 넣어 행진곡으로 작곡한 것인데 꽤 인기를 모았다. 나는 그 날 남성 4중창의 제1베이스를 노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음악회를 마친 다음 즉시 사은회로 들어갔는데 이때에 예기치 않았던 큰 문제가 생겼다. 여러 선생님들이 계신 앞에서 회고담이 오가는 순서인데 모두 나에게  '선생님 흉내'를 내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 없고 얌전하고 수줍은 성격이지만 곧잘 남의 흉내를 낼 줄 알았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교감선생님, 역사선생님 등을 차례대로 흉내를 낼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도 꼭 같게 흉내를 냈기 때문이다. 이럭저럭 사은회가 무사히 끝났나 보다 했더니 교감선생님께서 교무실에 잠깐 왔다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찾아 뵈었더니 웬걸 곤란한 사태가 벌어졌다. '사은회 때 왜 하필이면 선생님 흉내를 내느냐?'는 꾸중이다. 내가 한 흉내가 너무나도 같아서 온통 웃음바다가 됐을 때 선생님이 은근히 노하신 것이 분명했다. '네가 사과하지 않으면 졸업장을 줄 수 없다'는 말씀이고 보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인촌선생이 교장으로 계실 때 우리 아버지가 학감을 지냈기 때문에 나는 중앙고보와 인연이 깊은데다가 선생님들 중에는 우리 아버지에게 배운 분은 물론 아버지와 함께 봉직해오던 분들도 많이 계신 데다 음악 잘하고 비교적 모범생(?)에 속했던 터에 엄격하던 변영태 교감선생님의 비위를 거슬려 놓았으니 나도 어찌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결국 형식적으로 '죄 없는 사과'를 하고 물러 나왔다.
   나는 졸업하는 해에 동아일보 주최 「신춘 문예 현상모집 작곡부문」에 응모했다.
   작곡 모집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어 버렸지만 내가 작곡해서 낸 가곡 「가려나」가 - 뭔가 좀 잘못 되어서 인지 1등으로 당선이 되었다. 단 한편만 뽑는데 내가 되었으니 그때의 기분은 말로다 형용키 어려웠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이화여자 전문학교에 음악과가 있었을 뿐 남자가 다닐 수 있는 음악학교가 없어 일본에 건너가야만 했는데 음악을 전공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던 집안 어른들도 「가려나」가 당선된 뒤에는 어찌할 수 없이 허락해 주어 오늘날 작곡가가 된 것이니 천만다행한 노릇이다.

   이렇게 회고담을 쓰면서도 생각되는 것은 그 당시 우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이 모두가 애국자요 일류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현상윤(고대 총장), 변영태(외무장관), 김상기, 이상훈, 안재준(서울대학장), 이종우(홍익대학장), 최복현(서울시 교육감) 등등을 비롯하여 김형준(양악 수입기의 3대 공로자의 한분, 가곡 봉선화의 작사자), 이윤재(한글학자)등등이 모두 우리의 은사였기 때문이다.
 

<1975. 2월호 월간 학생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