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천사의 음성

나  운  영

   꼭 15년전의 일이 생각난다. 우리 내외가 결혼한지 10년만에 드디어 아들을 보게 되었으니 그때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미 딸 둘을 기르다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아들을 낳았으니 말이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아내를 간호한답시고 입원실에서 밤샘을 하긴 했지만 간호하는 일 보다는 내 작품을 쓰는데 열중했었으니 아내에게는 좀 미안스러운 일을 한 셈이다. 더구나 순산을 한 것도 아니고 수술을 받은 뒤에 마취가 깨기 시작할 때 그렇게도 괴로워 하는 아내를 지켜보면서도 말없이 작곡을 계속했었으니 말이다.
   여러 날 간호도 하랴, 작곡도 하랴, 신경이 피로할 대로 피로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깜박 잠이 들었을 때 나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분명한 천사의 노래소리였으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알 길이 없었다. 얼마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간호원 서너 명이 새벽 찬송을 부르는 음성이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뒤로 오늘날까지 그렇게도 아름다운 성가를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면 그들이 그다지도 노래를 잘 불렀던 것일까? 또는 그들이 부른 노래가 그렇게도 명곡이었던가? 아니다. 그들은 성악가도 아니었고 또 명곡을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성껏 찬송가를 부른 것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교회음악에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바하의 「B단조 미사곡」, 모차르트의 「레퀴엠」등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대곡 보다는 오히려 찬송가를 더 좋아한다. 흔히 찬송가라면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많은 듯하나 나는 절대로 찬송가를 경시하지 않는다. 찬송가야말로 단순한 듯 하면서도 부르면 부를수록 맛이 난다.

   찬송가란 첫째가 가사요, 둘째가 곡조이다. 즉 가사가 은혜스러우면 곡조가 좀 맛이 없다 하더라도 많이 불리어진다. 예를 들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부르는 찬송은 음정도 잘 안 맞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요 부르듯이 장식음을 붙여 가며 부르는데 웬일인지 구수해서 듣기가 좋다. 이것은 그분들이 가사의 뜻을 음미하면서 한국적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성가대원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도무지 맛이 없다. 물론 음악적으로는 잘 부르겠지만 가사의 내용을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도레미파」 대신에 가사를 발음하는 정도이기 때문에 은혜가 없다.
   찬송가란 특히 노래 부르는 사람 자신이 감격해서 불러야만 듣는 사람도 감동을 받게 마련이다. 아무 감격없이 부르는 찬송이란 「울리는 꽹가리」만도 못하다.
   내가 간호원 서너 명이 부르는 찬송에서 「천사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환자들을 위해 있는 정성을 다하여 - 기도하는 심정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들이 부르는 찬송에서 크게 은혜를 받은 사람은 비단 나 혼자 만이 아니었으리라.
   시골은 또 몰라도 20여년전부터 서울의 교회에서 성가대가 어쩌다가 찬송가를 부르면 이 일을 큰 수치로 여기게끔 되어 버렸는데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왜냐하면 찬송가를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은 앤셈, 칸타타, 오라토리오, 미사곡을 제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찬송가란 명곡, 대곡보다  훨씬 잘 부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교회가 앞으로 찬송가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갖어주기를 바라고 싶다.
   교회들은 찬송가를 바르게 부르는 운동부터 시작해야겠다. 우리는 찬송가를 마치 장송곡처럼 부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째즈나 비트리듬의 물결이 날로 날로 교회 안으로 스며드는 이때에 우리는 외국 찬송가를 올바르게 부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리에 맞는 우리의 찬송가를 많이 만들어서 부르는 운동을 또한 일으킴으로써 교회 안에서 교회음악을 구해내야겠다. 교회음악의 현대화와 세속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현대화에 힘써야겠다.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 찬송가에 의한 「천사의 음성」을 꼭 듣고 싶구나.

  < 1971. 1.15. 월간「세브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