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집 3 '스타일과 아이디어'
 

은혼식

나  운  영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은혼식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결혼 25주년 기념일에는 은혼식을 갖고, 50주년에는 금혼식을 가져 부부가 함께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 그 날의 감회를 새롭게 하는 것으로 백년해로를 한 내외로서는 크게 기념되는 뜻 깊은 행사라 아니할 수 없다.
  백년해로라고 하니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어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나는 이런 질문을 한 일이 있다. "한국사람의 평균연령이 몇이나 되느냐?" 했더니 모두들 60세라고 대답하기에 나는 2백세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요즈음에는 결혼을 두 번쯤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농담으로만 받아 넘길 수 없는 심각한 우리나라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한국사람의 평균연령이 2백세라는 농담이 오가는 시대가 되어 버렸으니만큼 우리 내외의 은혼식이 장안의 화제거리가 된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내외가 결혼 후 25년을 함께 살아가는 동안에는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오 ! 경사로운 날
     맑고도 깊은 사랑 변함이 없어
     이제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굳은 맹세로써 열매 맺는 날
     자연은 찬양하고 우주는 포옹한다
     오! 즐거운 이 날
     두 사람 앞길에 행복있으라

     오 ! 인생의 항로
     순풍에 돛을 달고 저어가며
     사랑의 보금자리 이룩할 때
     사나운 비바람도 뿌질지니
     오로지 굳세고 어진 사공되사이다
     오 ! 인생의 항로
     두 사람 앞길에 행복있으라

   이 「축혼가」는 내 아내가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것인데 내외가 25년 살아오는 동안에는 즐거울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슬플 때도 있었던 것이나 이 노래처럼 서로 사랑하고 믿고 아끼고 도와 굳세고 어진 사공이 되어 과히 잘못없이 살아오게 된 것을 먼저 우리 내외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 6월 4일 우리 내외는 명동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 말기요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었으니 살아가기가 매우 힘든 때였다. 쌀 배급커녕 보리 배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그때에 결혼을 했으니 살림 살이 하는데 있어서 많은 고생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강냉이 죽만을 먹고 살다가 영양실조로 졸도한 일도 있었고, 집을 마련하지 못해 학교 사택 신세를 지던 때도 있었다.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물지게를 줄곧 지던 때도 있었고, 첫 아기를 잃고 홍제동 화장터에 갔다 온 일도 있었다. 6.25때에 고생하던 일, 부산으로 피난 가서 또한 고생하던 일 등등 - 모두 괴로웠던 일만이 생각나니 아마도 즐거웠던 일보다는 괴로웠던 일이 더 인상에 남는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괴로웠던 일 못지 않게 즐거웠던 일도 많았다. 결혼한지 10년만에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내 집을 장만했을 때, 첫 번 작곡발표회를 가졌을 때, 아내가 독창회를 가졌을 때, 두 딸과 아들이 학교에 입학했을 때와 졸업했을 때, 운경 유치원과 서울 음악 아카데미의 교사가 준공됐을 때, 슈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를 사들였을 때 등등 - 즐거웠던 일이 줄을 이어 생각나니 분명히 우리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흔히 우리내외가 원앙부부니 잉꼬부부, 부부동도(同道)니 하여 신문, 잡지, 방송 등에 소개될 때마다 나는 더욱 자중해서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가정을 죽는 날까지 유지해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된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공처가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이에 대해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다.
   즉 공처가에는 세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두려울 공자 공처가(恐妻家)요, 둘째는 공경 공자 공처가(恭妻家)요, 셋째는 칠 공자 공처가(攻妻家)이다. 그런데 공처가라고 하면 의례 첫째 것만을 뜻하는 줄로 아니 한심한 노릇이 아닌가? 나는 어디까지나 둘째 것인즉 아내를 공경하는 사람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외견상 나는 양순해 보여 여성적이고 내 아내는 활발하여 남성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공처가(恐妻家)란 소문이 난 듯도 하나 나는 본래 성격이 외유내강이어서 겉보기에는 부드러운 것 같지만 속은 비교적 굳센 편인데다가 특히 가정생활에 있어서 항상 민주주의를 신봉, 실천해오고 있는 까닭에 아내를 두려워 하거나 더욱이 아내를 치는 일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할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내외가 모두 기독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서로 존경하고 아끼고 살아오고 있으니 공처가(恐妻家)나, 공처가(攻妻家) 아닌 공처가(恭妻家)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몇 해전에 「아내의 매력」이란 글을 청탁받았을 때에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 일이 생각난다. 「나는 월급이 얼마인지? 월급날이 언제인지? 한 달의 생활비가 얼마인지? 쌀값이 얼마인지 조차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저 월급봉투를 아내이자 하숙주인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칠 뿐이니 아마도 하숙생 쳐놓고는 좀 비싼 돈을 내는 하숙생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게 월급을 몽땅 바치고 그 중에서 십일조(?)를 용돈으로 받아 책도 사고, 구경도 다니고 교통비, 잡비로 쓰고 아무 불만없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도리어 하숙생으로 있는 것을 자랑하고 싶을 정도입니다」라고 했다.

   바하는 돈을 위해서 작곡한 일이 없다고 한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만 작곡했으나 하이든은 물론이고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먹고 살기 위해 작곡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네의 현실은 작곡만 해서는 먹고 살기조차 힘든 형편이어서 나는 25년 동안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 월급쟁이 생활이나 하숙생 노릇을 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바하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바하가 청년시절에 상처하여 성악가를 후처로 맞이했는데 이 여인은 남편의 예술을 깊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보를 잘하는 솜씨가 있어 13자녀를 기르면서 남편의 작품을 깨끗하게 베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300곡의 칸타타 가운데서 190곡이 후세까지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슈만은 피아니스트를 아내로 맞았는데 슈만은 결혼한 해부터 갑자기 주옥과 같은 수 많은 작품을 쓰게 된 것이다. 즉 슈만에 있어서 그의 아내는 매력의 원천이요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작곡된 작품들은 모두 그의 아내에 의해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하의 아내 안나 막달레나와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음악사상에 길이 빛나는 현모양처의 표본이 되어오고 있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안다.
   나의 경우도 이와 매우 비슷하지 않나 생각된다. 즉 나의 아내는 안나 막달레나처럼 사보를 잘 할 줄은 모르나 클라라처럼 내가 작곡하는데서부터 연주하는데 까지를 도맡아서 돌봐주고 있으니 절대로 클라라에 못지 않는 현모양처형이라고나 할까? 문득 부창부수(夫唱婦隨)란 말이 생각난다. 즉 남편이 하는대로 아내가 따른다는 말인데 나는 이 말을 부창부수(婦唱夫隨)란 말로 바꿔 생각하게 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내 작품을 내 아내가 연주할 때 - 다시 말해서 아내가 노래부를 때에 나는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니 부창부수(婦唱夫隨)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렇게 되면 또다시 공처가(恐妻家)를 연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자고로 우리 국악에 있어서 일고수 이명창이란 말이 있듯이 아무리 명창이라도 장구나 북 치는 사람이 좋아야 하는 법이니 내 작품을 아내가 노래할 때에 반주를 한다는 것은 누가 보든지 부럽게 생각될 줄로 짐작이 간다. 비단 아내는 내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하는데 그칠 뿐만 아니라 내 작품의 심사위원장의 중책도 맡고 있다. 즉 일단 곡이 완성되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이때에 아내와 큰 딸, 작은 딸, 아들이 모두 내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작품이 통과된 다음에야 아내가 발표한다.

   대체로 나의 가곡은 거의 다 아내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즉 나의 가곡 중에서 가장 널리 불리어지고 있는 「달밤」은 1947년에 작곡되었으니 결혼 후 2년째 되는 해에 작곡된 것이고 이밖에 「박쥐」, 「가는 길」, 「아흔 아홉 양」, 「별과 새에게」, 「강 건너간 노래」, 「접동새」 등은 모두 결혼 후 5년동안에 작곡되었고 또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즐겨 불리어지고 있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편)을 비롯하여 「피난처 있으니」(시 46편), 「여호와여 구원하옵소서」(시 12편)은 6.25사변중 부산에서 작곡되었고 한편 「당나귀」, 「꽃과 고양이」, 「구혼」은 정부 환도 직후에 작곡되었는데 모두 아내가 방송이나 음악회 때에 또는 교회예배 때에 처음으로 발표했던 사실을 생각하면 클라라의 경우와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집을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한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패이다. 쇠로 만들어진 문패에는 「나운영」 「유경손」 두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어느 집엘 가보든지 문패를 보면 남편의 이름 뿐이다 좀 더 봉건적인 가정에 있어서는 할아버지의 이름만이 붙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아내의 문패를 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내는 남편의 예속물인가? 대체로 여성들은 일단 출가하면 아무개의 아내 또는 아무개의 어머니로 통할 뿐 아예 이름이 없어지고 마는 예가 많다. 나는 항상 민주주의를 신봉, 실천하는 의미에서 우선 문패부터 고쳐 달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한글 전용에 앞장서는 뜻에서 한글로 새겨 달아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아이디어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
  중앙고보 시절 나는 은사 이상훈 선생님 문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간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거진 35년전의 일이었는데 그때 이 선생님 댁 문패에서 분명히 두 내외분의 성함을 발견했었다. 그때의 일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관계로 아직도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도 하려니와 그 기억을 더듬어 나도 문패를 고쳐 달기로 한 것이다. 그까짓 문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우리나라의 모든 남편들은 아내의 존재를 바로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내를 집안에 가둬 놀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회참여란 말이 있듯이 여성도 아내도 사회참여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아내가 집안만 지키고 살아야만 할 때는 이미 지나가 버린지 오래이다. 나는 이런 뜻에서 아내가 사회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 장려, 후원하고 있다, 따라서 아내는 한낱 가정의 주부일 뿐만 아니라 교편도 잡고, 교회 집사일도 보고, 운경유치원 원장이기도 하고, 서울 YWCA 이사로, 기독교 유아교육 서울시 연합회 회장이요, 서울 음악아카데미 부원장이요, 운경합창단 지휘자 등등으로 눈코 뜰 새없이 활약하고 있으니 국가 사회발전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단지 충실한 하숙생으로 자처하고 있는 나로서 하숙주인(?)이 많은 감투를 쓰고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정력과 정열에 - 아니 그 능력과 정성에 머리가 수그러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다시 은혼식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실 나는 은혼식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었고 만약 은혼식을 올린다 하더라도 가족끼리 좀 조용조용히 하기를 원했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세상이 다 알게 되어 버렸으니 별 도리가 없긴 하나 그렇다고 000도 아닌데 은혼식을 숨어서 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 하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요즈음 외국의 나쁜 풍조가 들어온 후부터 백년해로를 두세 번씩 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는 이때일수록 은혼식을 소중히 여기고 자랑스럽게 일반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신뢰와 사랑이 얽힌 우리들의 지난날
   세월은 살같이 흘러 스물다섯 해 라네
   오 ! 내 사랑하는님 내님 그대 사랑 변찮아
   지난날을 더듬어 사랑을 노래하리

   이 「은혼식 노래」는 내 아내가 작사한 것으로서 은혼식 때에 우리 내외가 경영하고 있는 운경합창단 45명에 의해 은혼 신부 지휘 아래 불리어졌다. 이에 나는 답사를 대신해서 이런 말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전 우리 내외가 결혼을 할 때에는 나는 작곡을 전공하는 무명청년이었고, 아내는 성악을 전공하는 아리따운 소녀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아내가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까닭에 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감투를 쓰고 있고 나보다 훨씬 유명해졌으니 한없이 기쁘기는 하나 혹시 이러다가는 남에게 빼앗기지나 않을까 염려도 되어 드디어 계약갱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농담 섞인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다시 말을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부부 생활이란 소나타 형식과 같은 것이어서 서로성격이 틀리는 남편(제1주제)과, 아내(제2주제)가 제시부에서 결혼생활이 시작되어 이제 25년만에 드디어 발전부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앞으로 더 잘 살아서 재현부의 금혼식을 맞이할 때까지 여러분께서 변함없이 우리 두 사람을 사랑하고 아껴주시고 지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은혼식 때에 축사를 해 주신 분 가운데 특히 최이권 선생님(서울 YWCA 회장)께서 즉흥시를 낭독하셔서 우리 은혼부부는 물론 모든 하객들에게 크게 감명을 주셨는데 이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모여 찬미함은 형제자매 즐거움
     거룩하신 주의 뜻대로 은혼식에 모였네
     나운영과 유경손은 한몸되어 살았고
     아들 딸이 모두 함께 주님 뜻을 받았네

   우리 두 내외는 앞으로 다시 25년동안을 살아갈 때에 이 축시를 항상 기억하고 공적생활에 있어서나 사생활에 있어서나 악에 물들지 않고, 실수함이 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깨달아 알고 힘찬 출발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
   앞으로 다시 금혼식을 맞이하려면 내 나이가 73세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나에게 특별한 건강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고 작곡과 저술을 통해 이 겨레와 이 나라를 위해 꾸준히 일한다면 73세쯤은 넉넉히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 특히 조로증 환자가 득실거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손에 피가 마를 때까지 일을 해야겠다. 시기, 질투와 모략, 중상이 심한 요즈음에 있어서 지난날 보다 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
   이렇듯 은혼식 이야기를 털어 놓다 보니 본의 아닌 아내자랑을 하고만 느낌이 없지 않다. 자고로 "아내 자랑하는 사람치고 좀 모자라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새삼 생각난다. 나는 내 자신이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서 모자라는 부분을 아내에게서 찾아내어 이를 보충하려고 할 따름이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지혜가 완전히 합쳐져야만 보다 크고 보람있는 새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은혼식을 계기로 우리 내외는 거듭나는 새 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1970. 9. 월간 여성동아>